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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07. 2021

고독과 외로움은 뭐가 다를까?

『유쾌한 고독』, 안용태

저자 안용태는 스스로 평하기를 '처음부터 꿈꿔왔던 일이 아니라 살다보니' 인문학을 업으로 삼게 된 인문학 작가다. 과연 그의 이력을 듣노라면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음악가를 꿈꿨고, 또 성인 이후의 10년 남짓한 세월을 변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에 매진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게 <허사>로 끝났다. 꿈꿔왔던 가능 세계가 허망하게 스러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당사자의 가슴은 한때 부풀었던 가슴 만큼이나 아픈 법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굴하기는 커녕 오히려 '가능 세계의 실현 가능성을 모두 '소진'했기에 정말 자신이 원하던 삶, 요컨대 한 때 꿈꿨으나 세상과의 타협 아래 내려두었던 삶을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에겐 인문학이었다. 이러저러한 삶의 굴곡 속에서 그에게 큰 위로를 준 것, 다시금 일으켜 세운 것, 홀로 있는 그를 직면하게 한 것이 인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그가 인문학 작가가 된 것은 그와 같은 굴곡에 마주한 이들에게 그의 사색을 나눠주고 싶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그의 책 『유쾌한 고독』은 그의 삶에서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던 고독, 선택, 관계, 가족, 의미라는 다섯 카지 키워드에 대한 그의 인문학적 사색을 담은 책이다. 그는 이 다섯 가지 키워드에 대한 독자의 지평을 넓히고자 영화, 소설, 혹은 철학가들의 사상을 적절히 녹여냈고, 이러한 그의 시도는 나름 성공적이지 싶다. 독자는 그의 도움에 기대 다섯 키워드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비교적 쉽게 도달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슈클로프스키의 말 대로 '시가 일상 언어의 낯설게 하기'라면, 철학이란 '일상을 낯설게 보기'일지 모르겠다. 저자와 보조를 맞추어 평범한 일상적 사건들을 낯설게 보고, 그렇게 사유의 험난한 구릉을 몇 차례 걷다 보면 철학적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고독


저자는 외로움과 고독을 혼동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에 따르면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정서인데 반해 고독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정서다. 즉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깨달을 때 느껴지는 것이라면, 고독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감을 인식할 때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을 때 혹 외로움을 느꼈다면, 그것은 사실 외로움이 아닌 고독일 것이다. 무수히 많은 타인들 속에서도 혼자 있는 자기 자신을 대면함으로 빚어진 정서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고독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자아낸다. 하기야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이 당연히 '나'라고 여기기 마련인데 나가 '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면 어찌 불안하지 않으랴. 그러므로 불안은 고독을 감각할 수 있는 인간의 당연한 정서라 해두자. 하이데거는 불안의 이유를 '피투성'에서 찾는다. '피투(被投)', 즉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뜻이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은 삶의 목적이 선재할 리 없다. 그런데 마치 목적이 정해진 양 살아간다면 이는 자기기만이다. 이를테면 자기는 마치 변호사가 되기 위해, 연예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양 실존에 대한 고민은 집어치우고 오로지 자아 실현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실존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삶의 고독을 애써 무시하지만 언젠가 돌아돌아 반드시 '사막'과도 같은 고독의 장소에 이르게 된다. 존재는 본래 불안이기에.


저자는 고독을 예찬한다. 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단독자'임을 깨닫게 한다. 반면 고독을 외면한 자는 자신이 단독자 임을 깨닫지 못하고는 '외로움'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들은 사람들과의, 혹은 세계와의 결합이 당연한 전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세계와 동떨어진 존재의 현실을 비관한다. 하지만 단독자의 전제는 다르다. 존재는 본래 고독이며, 따라서 결합은 감사한 일이다.












선택


'인생은 B(탄생)와 D(죽음) 사이의 C(선택)이다.' 수없이 인용되어 닳고 닳은 사르트르의 선언 중 하나다. 살아가다 보면 과연 사르트르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여기'의 삶은 무수히 많은 선택의 집합과 다름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오늘날 우리의 수많은 선택들이 실은 타인의 선택일 때가 많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명문대에 간다거나, 변호사나 의사가 되길 원한다거나, 혹은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다거나 등등. 우리의 선택지 아래 놓인 것들은 실은 사회적 욕망이며, 사회적 요구일 때가 많다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자신의 선택을 들여다보자면, 우리는 단지 타인의 선택을 대리하는 존재에 불과하진 않을까. 자기 삶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소외된 선택을 하는 거다. 그렇다고 섣불리 용기를 강권할 수도 없다. '남들이 가지 않는 너의 길을 가라'는 말 조차도 실은 우리를 그저 세련되게 옥죄는 '타인의 선택'의 진화된 양상일지 모른다.











관계



실존주의자들에게 '관계'는 우리의 실존을 좌절시키는, 마치 니체의 사자적 정신을 방해하는 용의 정신과도 같은 위상을 갖는 듯 하다. 하지만 단순히 관계의 부정적 측면에만 주목하기엔 우리네 삶의 수많은 기쁨이 관계로부터 나오지 않는가. 따라서 관계는 그 부정적 측면과 더불어 긍정적 측면이 늘 함께 토론되어야만 한다. 타자가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가치는 바로 '변용'에 있다. 우리는 타자를 통해 변용된다. 쉽게 말해 우리는 타자 덕분에 새로운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 자신 안에 깃들어있던 낭만적인 '나' 자신을 대면하게 되며, 또 단란한 가정을 꾸림으로써 의젓한 '부모'가 되어보기도 한다. 이는 홀로 고립된 사람은 결코 누릴 수 없는, 그야말로 타자를 통해서만 누리는 삶의 커다란 기쁨이다. 내 안에 내가 미처 모르던 '나'를 발견해주는 타자와의 관계에 기꺼이 뛰어들자.









가족


어느날 한 가난한 가정에서 아버지가 가족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나 이제 회사 그만두고 배우에 도전해볼까봐.' 이를 들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거다. 온가족이 아버지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어디 아버지에게만 그럴까. 부모는 자식이 열심히 공부하길 바라며, 자식은 부모가 돈을 벌길 바란다. 이는 가족 구성원들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본분에 맞는 역할과 기능을 기대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처럼 가족이 각자의 역할에 대한 정답을 미리 지니고 있다면 가족 간의 소통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가령 자식이 열심히 공부하길 바라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말을 건다고 이야기해보자. 이미 아버지의 머릿 속에 '자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는 결론이 있다면 그것이 설득이지 대화일 수가 있으랴.


많은 부모들이 자녀 문제로 심리 상담을 받을 때 대화 문제를 토로한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대화를 해보려 하는데 자식이 도무지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그들은 자식과 '대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화였던 적이 없는 것'이다. 각자의 역할에 대한 규정 짓기를 철폐하지 못한다면 소통이란 꿈꿀 수 없는 일이리라.










의미


유대인 수용소에서 처참한 나날을 보내던 빅터 프랭클은 그의 주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한 커다란 교훈을 남긴다. 삶의 의미는 성취가 아닌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우리에게 '~이 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아가 '~이 되어 ~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성취의 영역에서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주어진 삶에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의지 자체에서 삶의 의미가 실현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빅터 프랭클의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것은 그의 사상이 어떤 이론적 성찰로부터 기인하기 이전에 체험적 사유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동료 죄수들의 비참한 최후를 수없이 목격했으며, 의미를 상실한 인간의 허무감을 아프도록 겪는다. 그때 프랭클이 결심한 것은 '의미를 찾기 위한 의지' 자체에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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