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나간 과거는 진정 지나간 것이라 불리울 수 있을까. 이는 홀로코스트를 위시한 독일의 나치 과거를 연구하는 학자들, 요컨대 나치의 참혹한 만행을 역사화하는 작업에 착수한 학자들에게 숱한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그들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뉘곤 했다. 한편에선 지나간 과거를 기약없이 곱씹는 일을 중단할 것을 선언하며 이제 그만 죄책감과 우울의 정서에서 탈출할 것을 호소하고, 또 다른 한편에선 그것이 채 지나가지 않은 과거이며 언제까지고 되살려 읽어야 할 우리 모두의 본질적 역사임을 주장한다. 여기서 후자의 주장, 즉 나치 과거가 '채 지나가지 않은 과거'라는 것은 그것이 시간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가냘픈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말 그대로 '아직 지나가지 않은' 과거를 뜻한다. 홀로코스트를 초래한 바로 그 <악심>이 결코 사라진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성선설, 성악설 따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쟁과 무관하다. 애초에 앞서 언급한 악심의 의미는 성악설이 전제하는 악과 무관하니 말이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 됐든 분명한 사실은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역사에 실재했다는 것이며, 그것을 저지른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홀로코스트의 발생은 시간적으로 과거에 속하므로 그것이 지나간 과거로 보이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행한 존재 역시 우리와 무관한 과거의 인간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체 그것은 현재의 우리와 어떤 관련을 맺을까.
작품의 전면에 드러나는 표면적인 제재는 나이 많은 여자와 어린 소년의 비정상적인 사랑 이야기다. 하여 뭇 독자들은 두 인물의 일탈적 사랑이 과연 허용가능하냐 마냐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수준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곤 한다. 물론 작품의 감상 방식은 수없이 다양하기 마련이며, 또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그것을 읽는 독자에 의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기꺼이 탄생할 운명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슐링크의 책 『책 읽어주는 남자』는 통속적인 연애소설로만 해석되기엔 더 커다란 몸통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두 인물의 사랑을 사람과 사람이 아닌 세대와 세대의 만남으로 바라볼 때 작품의 본의에 더욱 가까이 닿을 수 있지는 않을까. 요컨대 둘은 전전세대와 전후세대의 알레고리는 아닐까.
소년의 이름은 미하엘(Michael), 그는 황달을 앓는 병약한 소년이다. 하루는 그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미하엘은 그 날도 여지없이 골목 어귀에서 몸을 숙이고 구토를 하고 있었다. 이때 미하엘의 모습을 보고 한 여인이 다가와 도움을 준다. 그녀는 한나다. 그들의 관계는 이다지도 우연하게 시작된다. 그날 이후 둘은 이따금 한나의 집에서 사랑을 나눈다. 같이 샤워를 하기도 하고, 서로의 몸을 애무하기도 한다. 특이한 점은 미하엘이 한나를 위해 책을 읽어주어야 했다는 점이다. 마치 그것이 그들 관계의 정체성인양 말이다. 하지만 얼마후 한나가 돌연 사라지며 그들 관계는 급작스레 마무리되고 만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미하엘은 법학과에 진학한다. 그는 학교 세미나의 일환으로 동료들과 함깨 법정에 방문한다. 법정에서는 나치 과거를 지닌 사람들의 죄질을 심사하고 판결을 내리는 일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웬걸, 미하엘은 그곳에서 다시 그녀를 마주한다. 법정에 앉아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피고, 그녀는 바로 한나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소년의 첫사랑이 이제 죄인의 신분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이제 미하엘은 그녀를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과 역사의 죄인으로 앉아 있는 현재의 그녀 사이에서 어떤 방식으로 화해해야 할 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하엘에게 한나라는 인물은 묻어뒀던 과거를 현재로 되살리는 존재다. 가정에서도 말수가 적던 미하엘은 부모 세대의 책임에 침묵으로 공조했던 인물은 아니었던가. 요컨대 미하엘에게 나치 과거란 책에나 존재하는 지나간 과거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거를 덮어두고 열어보지 않으려는, 마치 그것이 나와는 무관한 옛 이야기라 치부하는 태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미하엘의 눈앞에서 심판을 받고 있는 한나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인 동시에 나치 과거에 순응했던 감시자다. 이로써 전후 세대의 미하엘은 전전 세대의 한나를 통해 나치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일체화를 통해 과거가 현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는 비단 미하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후 세대는 어떠한 식으로든 전전 세대와 관계를 맺는다. 가족, 사랑, 우정 등 그 무엇이든 말이다. 이때 전후 세대는 전전 세대의 과거를 어떻게 청산해야 하며, 과연 청산되어질 수는 있는 것일까. 이를테면 그들의 죄책감을 얼마만큼 같이 짊어져야 하며, 또 그들의 죄는 어떻게 물어야만 하는 것일까. 대체 그들의 과거는 극복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는 한 것일까.
재판 과정에서 미하엘은 한나의 비밀을 한 가지 깨닫는다. 그녀는 왜 소년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일까. 그녀는 기실 문맹이었다. 즉 그녀는 읽고 쓸 줄을 모른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수치심을 느낀다. 자신의 문맹에 관해 한나가 느끼는 수치심의 크기는 필적감정을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로부터 극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 필적감정에 응했어야 하지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자진하여 죄를 뒤집어 쓴다. 이는 수치심에 관한 세간의 인식에 적잖은 당혹감을 선사하는 대목이다. 한나는 민족을 팔아넘긴 배신자라는 정체성보다 고작 개인의 무지가 더욱 수치스러웠던 것일까. 한나가 스스로 인식하는 내면의 수치는 정작 그녀를 더 깊은 수치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기능을 한다. 예컨대 그녀는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있었고, 회사 내에서 더 높은 직급으로 승진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회를 모두 거절한 것은 바로 그녀의 수치, 즉 문맹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수치 때문이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그녀를 나치의 공조자로 이끈다. 수치에 대한 그녀의 빈약한 해석이 진정한 수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을 아둔하게 만든 것이다.
사실 한나의 문맹은 슐링크의『책 읽어주는 남자』가 비난 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치 과거에 공조했던 독일인들의 나약한 이기심을 고작 개인의 무지 탓으로 변명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근거 없는 비난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컨대 한나라는 이름은 <악의 평범성>을 제안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진하게 암시한다. 특별 취재원으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외양이 대단히 섬뜩할 줄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너무나도 평범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다. 아이히만의 모습은 동네 이웃과 같은 평범한 모습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나 아렌트가 가닿은 결론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악인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즉 아이히만의 죄는 <사유하지 않음>의 죄였다. 이러한 무사유적 존재는 슐링크가 창조한 한나의 문맹과 접점을 이룬다.
아이히만이 스스로 죄의 무게를 깨닫지 못한 바와 같이 한나도 자기 죄의 심각성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눈치다. 예컨대 한나는 자신의 죄를 한창 열심히 따져묻는 판사에게 무구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이는 결코 뻔뻔한 죄인의 태도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그녀는 정말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죄를, 자신의 행동이 끼치는 해악을 진실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적 흐름은 한나의 무고를 입증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한나의 수치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할 만큼 무지했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수치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행태를 보였다. 어쩌면 무엇이 더 막심한 수치인지도 모르는 그녀는 진정한 수치를 경험하지 못한 것일 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바와 같이 죽음이라는 관념이 부재한 동물은 진정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한나가 문맹에서 벗어나 점차 사유적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대목은 퍽 의미심장하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진실로 인식할 수 있는 사유에 다다른 것이다. 무릇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의 반성은 진실되지 못한 법이 아닐까. 그녀는 이제서야 자기 죄의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수감생활을 다 마친 후 출소만 앞둔 시점에 구태여 자살을 택한 것도 어쩌면 온전히 속죄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을 다 마치기도 전에 목숨을 끊는 것은 사회가 그녀에게 부과한 죗값을 회피하는 손쉬운 속죄에 불과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책 읽어주는 행위'의 주체가 전후 세대로 대변되는 미하엘이라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미하엘은 책을 읽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나에게 진정한 수치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도움을 주었다. 요컨대 전후 세대의 막중한 책임 중 하나는 지나간 과거의 수치를 기록하고 정리하여 전전 세대에게 일러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