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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03. 2021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모두가 두려워하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에드워드 올비


삶이 절망일 때 우리는 낙원을 상상한다. 바라는 모든 염원이 성취되고, 사랑에의 소망이 모두 실현되는 천국, 그리하여 이 땅의 좌절과 실망이 모두 위로받는, 아니 애초에 좌절과 실망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칠흙같이 어두운 현실의 삶을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뒤집힌 현실인식>, 즉 공상이다. 본래 <유토피아>의 뜻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듯 우리가 공상하는 바 낙원은 도래의 불가능성을 제일 속성으로 삼는 것이다. 물론 이뤄지지 않는 모든 것들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고 함석헌이 이야기했듯 <따라가도 따라가도 잡을 수 없는 별이기 때문에 영원히 길잡이가 되는> 길잡이 별처럼, 탁월한 지향점은 우리 삶을 사막에서 건져내고 오아시스로 인도한다. 다만 공상의 대상으로서 낙원이 심각한 해악이 되는 까닭은 현실의 삶을 지옥인양 비추는 <왜곡된 거울>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의 불행'과 '공상'의 관계는 동시발생적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공상에 관한 진부한 통념, 즉 현실의 불만족으로부터 공상이 빚어진다는 인과론적 해석은 실은 타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공상으로 인해 현실의 불행이 더욱 과장되는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소망하는 공상에의 단념 없이 우리는 결코 <불행한>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공상을 단념하기란 쉽지 않다. 온갖 이미지가 난무하는 매체 미디어의 시대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공상의 <재료>들을 건네받지 않는가. 각종 SNS를 통해 노출되는 타인들의 찬란한 삶이 그러하다. 실상 그 찬란함이란 그들 삶의 비루함을 성실히 걷어내고 남은 단 한 조각, 그마저도 부단히 가공된 한 조각일 뿐인데 그것의 집합이 드리우는 효과란 실로 엄청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타인의 삶을 염원하게 되고, 하지만 좌절하게 되며, 비로소 공상하게 되는 것이다. 공상 없는 삶이 도저히 두려운 탓이다. 하기야 누가 공상 없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과 거짓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선 현실을 살아낼 수 없음을 처절하게 그려내는 책,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이다.







작품 전면에 드러나는 인물은 네 명이다. 그들은 두 쌍의 부부로, 한 쌍은 마사와 조지, 또 다른 한 쌍은 허니와 닉이다. 마사와 조지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종일 으르렁대고 이를 드러내 보이길 개의치 않는, 오래되고 익숙한 부부다. 서로를 할퀴는 것에 관하여 그 누구보다 정통한 전문가랄까. 어쩌면 이는 당시 미국 사회의 가정상에 대한 조소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교수였던 조지와, 그 대학의 총장을 아버지로 둔 마사는 과거 미국적 행복의 요소로 기능하기 충분했으니 말이다. 예컨대 그 시대의 미국인들은 정원이 딸린 집과,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차 한 대,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을 행복의 요건으로 보지 않았던가. 즉 마사와 조지는 가히 숱한 미국인들로부터 <공상되었던> 가정의 전형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하지만 부부의 민낯은 기대와 달랐다. 그들의 말은 서로에게 칼이었고, 그들의 몸짓은 서로에게 독이었다. 추악하고 끔찍한 욕지기를 주고 받는 그들의 대화는 미국의 가정상에 대한 환상을 깡그리 박살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둠이 아주 깊은 밤, 닉과 허니가 마사 부부의 집으로 초대를 받는다.







마사와 조지는 아이가 없다. 말 그대로 그들은 아이를 낳은 적도, 기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이가 있다. 상상 속의 아이. 그들의 상상은 아이를 창조해냈고 아이는 그들 가정의 일부가 되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아이는 <행복한 가정>을 완성하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헛된 공상은 현실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비추는 <왜곡된 거울>로 기능하는 법이다.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뒤집힌 현실 인식> 속에서 도리어 존재하지 않던 불행이 존재하게 되는 역설이 발생하니 말이다. 따라서 마사와 조지가 주고 받는 추저분한 대화들은 <상상의 아이>를 만든 원인이기보다 결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들의 불행으로부터 아이의 존재가 요구된 것이 아니라, 아이를 향한 요구로부터 불행이 야기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반쪽짜리 해석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마사와 조지가 극의 중반부를 넘어서부터 드러내는 고통은 본래 존재한 바 있던, 즉 실체가 있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없던 고통이 아이로 인해 생성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조지가 작품의 말미에서 호소하는 고통은 그가 어릴 적 부모님께 저지른 끔찍한 일로부터 기인한다. 이는 상상의 아이가 조지의 삶에 소환한 사후적 고통이 아니라 이미 조지의 삶에 선재했던 고통인 것이다. 마사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야망 가득한 아버지의 바람에 못 미치는 딸로 자랐다는 죄책감이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죄책감으로부터 달아나고자 조지에게로 피신한다. 대학 교수 조지가 마사의 아버지가 자리한 총장직을 발판삼아 종전에 못 이룬 꿈을 실현해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조지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야심은 마사에 비하면 대단치 못한 것이었다. 이로써 다시금 좌절에 부딪힌 마사의 선택은 마침내 조지의 선택과 조우하게 된다. 그들은 상상의 아이로 도피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거짓은 마사와 조지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 집에 방문한 허니와 닉도 그들 삶의 불완전함을 거짓으로 메꾼다. 예컨대 닉 부부는 과거 허니의 유산으로 마음 아파한 적이 있으나 유산의 원인은 사실 허니의 의도적인 피임 탓이었으며, 또한 허니는 마사 부부의 집에 방문한 날 닉이 마사의 몸을 탐하며 욕정을 불태운 것을 알면서도 이를 모르는 체 한다. 그들은 현실은 인정하기로 작정하는 순간 도래할 현실의 무자비함이 두려워 이를 은폐하고 묵인하기로 마음을 모은 것이다.








거짓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를 타개할 해결책의 실마리는 엉뚱하게도 마사에게로부터 나온다. 그녀는 조지에게 말했다. "당신은 화낼 때가 제일 멋있어." 어쩌면 이는 그들 대화의 추잡함을 반영하는 수많은 실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대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 대사는 특별한 이질감 없이 독자들에게 스치듯 읽혀 지나가고 만다. 하지만 평소 애드워드 올비의 문제 해결 철학을 염두에 둘 때 이는 결코 무의미한 대사가 아닐 수 있다. 이를테면 애드워드 올비의 또 다른 작품 <동물원 이야기>에서 올비는 인간과 인간의 '접촉', 혹은 '관계'의 중요성을 피력하기 위해 치열한 갈등과 분노, 심지어 죽음을 방법론으로 제시하지 않던가. 즉 올비에게 투쟁이란, 싸움이란, 혹은 욕설과 폭력이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자 방법론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의 화, 즉 그의 <분노>는 수면 아래 모습을 감춘 현실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태도이자 전략일 것이다. 상상의 아이를 <죽임>으로써 그들은 본래의 불편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이를 죽이는 것, 즉 환상을 깨뜨리는 것은 쉽지 않다. 마사의 말 대로 그들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독특한 제목의 기원은 <Who's afraid of the big bad wolf?>라는 동요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늑대를 무서워 하는 아이들의 동심을 짓궂게 놀려주는 노래다. 하지만 도시 아이들에게 실상 늑대가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동요 속 늑대는 그저 놀이를 위해 가공된 공상의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늑대의 야수성은 실제적이면서도 허구적인 셈이다. 늑대가 눈 앞에 있다면 위험할 테지만 과연 그럴 일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제목,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단순히 비슷한 발음을 통해 발휘된 유머로만 해석되어선 안 될 것이다. 이는 차마 늑대라는 단어조차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두려움의 반영이자, 관념적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적 태도에 대한 절충적 수용이다. 요컨대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을 썼으나, 또한 삶을 살았다. 우리 역시 상상 속에서 미래를 그릴 지언정, 끝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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