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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27. 2021

이제 우리 동경은 접어둡시다.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삶의 찬란함이 지극하고 마음이 풍만하여 꼭 머무르고픈 순간이 있다. 다가올 미래는 그에 비길 수 없을 것이며 퍽 절망과 다름 아닐 거라는 오만이 우리의 걸음을 막아서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실로 동경되어진다. 그렇다. 우리는 절정을 <동경>한다.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여 열매를 맺는 순간, 생명의 신비 앞에 온 우주가 귀를 기울일 것만 같은 순간에 우리는 잠시 멈춰서길 원한다. 시계의 전원을 꺼뜨리고 잠시 우주적 질서에서 고요히 비껴서 있길 바란다. 온 생명을 바쳐도 좋을 만큼 처절하게 갈망하는 것이다. 이다지도 해갈하기 어려운 조갈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동경은 바로 그 <성취 불가능>으로부터 다시금 더욱 동경되는 양성 피드백의 모습을 취한다. 무언가를 동경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동경 되어지는 <대상>과의 간극 속에서만 비로소 그것을 절실히 동경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저 멀리 <건너편>에 존재하는 대상만을 동경한다. 요컨대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만을 동경하며, 가져질 수 없는 것만이 동경된다. 따라서 동경은 때로 <환상>과 맥을 같이 한다. 현실에서 성취 가능한 것, 점유 가능한 것들은 감히 동경 되어지기에 대단히도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동경은 무엇이고, 또 당신의 환상은 무엇이며, 또한 당신의 그 둘은 얼마나 닮아 있는가. 동경의 끝에서 끝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들의 이야기,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다.






역사학도 <펠리페>는 신문의 일자리란에 실린 구인광고를 발견한다. 급여는 적지 않았고, 업무는 어렵지 않았다. 웬 횡재일까. 이윽고 펠리페는 쉽게 돈이나 벌 요량으로 광고에 적힌 주소를 찾아간다. 참 묘한 곳이다. 대낮에도 어두움이 내려 앉아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같은 곳. 힘겹게 앞길을 더듬어 방문을 열어제낀 펠리페를 한 노파가 맞는다. 노파의 이름은 <콘수엘로>. 그녀는 펠리페에게 몇 마디를 건네더니 곧 펠리페가 해야 할 임무를 일러준다. 임무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콘수엘로의 남편, <요렌테>의 비망록을 정리하는 것이다. 펠리페는 어렵지 않은 일에 썩 내키다가도 묘한 기운과 분위기에 두려움이 엄습하여 다시 고민에 휩싸인다. 그때 젊은 여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초록 눈동자가 빛나는 그녀의 이름은 <아우라>, 콘수엘로의 조카다. 이윽고 펠리페의 눈은 그녀를 향한다. 아우라의 눈동자는 빛나고, 펠리페는 일을 맡기로 결심한다. 이제껏 저택에 드리운 어둠은 일순간 물러났던 것까. 그날 이후 펠리페는 요렌테의 비망록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따금 아우라를 지켜보는 즐거움은 물론이다. 언제 바라봐도 그녀의 묘한 눈동자는 신비하다. 누구라도 빨려드는 썰물 같다가도 이내 튕겨 나올듯한 밀물 같은 눈동자. 그러다 문득 펠리페는 왜 아우라가 이곳에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혹시 콘수엘로가 아우라를 으르고 협박하여 이곳에 붙들어두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구해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펠리페는 이내 헛된 상상을 부수고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온다. 요렌테의 생애와, 그의 행적, 그의 과거 발언들과 사진들을 솜씨 좋게 정리한다. 그때 펠리페의 시선이 한 사진 위에 떨어진다. 요렌테가 죽기 전 콘수엘로와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든다. 사진을 바라보자니 콘수엘로 옆에 서있는 남자가 점차 펠리페 자신처럼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콘수엘로는 아우라가 된다. 이윽고 펠리페의 방문이 열린다. 초록 눈동자의 여인이다. 그녀는 사랑을 읊조리고 펠리페와 하나가 된다. 이내 깜깜한 애무로 방이 찌벅거린다. 곧 펠리페의 스스러운 손이 아우라의 살결로 향한다. 하지만 켜켜로 빼곡한 주름이 펠리페의 손에 닿는다. 그녀는 바로 콘수엘로다. 그렇다면 펠리페는 펠리페 자신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근대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가라타니 고진에게 감히 묻고 싶다. 당신은 푸엔테스의 <아우라>를 읽었느냐고. 물론 맞지 않는 질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에게 근대문학이란 윤리적 과제를 부여 받은 참여 정신의 소산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또 내가 <아우라>를 그에게 치켜세우고픈 이유는 그가 문학의 찌꺼기처럼 여긴 <오락적·생산적 교훈>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내가 의미한 <오락>이란 그가 매도한 오락의 성질과 궤를 달리 한다. <아우라>가 오락적일 수 있는 건 그 형식의 파괴성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작품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곱씹어 읽어 보지.' 여기서 <너>는 작중 인물 <펠리페 몬테로>를 지시한다. <아우라>의 작가 푸엔테스는 시종일관 펠리페 몬테로를 <너>로 지시하며 그의 행동을 서술하는 이인칭 서술 기법으로 극을 펼쳐나간다. 마치 피사체가 프레임을 가득 채우도록 촬영하는 <타이트샷>의 구도처럼 작가 푸엔테스는 펠리페 몬테로의 곁에 바짝 다가서 그를 목빠지게 쏘아보는 것이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펠리페의 시선을 보다 가까이서 체험하게 되며, 심지어는 작중 화자가 지칭하는 <너>가 실은 독자 본인이 아닐까 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를테면 초대장인지 아닌지 모를 무언가를 눈앞에 둔 느낌이랄까. 이때 능동적인 독자라면 <참여에로의 의지>를 구태여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푸엔테스는 우리의 <참여>를 노골적으로 독려하는 것이다. 이에 가라타니는 콧방귀를 뀔 지도 모른다. 고작 한다는 참여가 정치도 아니고 환상이라니, 역시나 소설의 남은 과제는 오락 뿐이라고 양양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제도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예컨대 민주주의 사회는 삼권분립과 상호 견제의 시스템이라는 제도적 구성체와 더불어, 그것이 올바른 사회 정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시민들의 관념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즉 사회라는 추상적 집합이 성립하기 위해선 언제나 관념적인 시민들, 혹은 시민들의 관념이 보장되어야 하며, 즉 건강한 사회는 시민으로 하여금 올바른 관념이 무엇인지 고민하길 요구하는 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라타니가 규정한 <참여>의 정의가 얼마나 협소한지 목격하게 된다. 그는 <수신>을 제한 채 <평천하>를 외쳤던 것이다. 오락적 반전을 통해 개인의 부박한 심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결코 오락에만 그치지도, 정치의 건너편에만 머무는 것도 아닌 셈이다.






노파 콘수엘로는 늙고 추레한 여인이다. 안면을 메운 주름의 빼곡함이 그녀의 모질었던 삶을 슬며시 드러내보인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세상이 꽃이었던 시절이 있다. 그녀의 삶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피어나는 꽃의 만발함이 세상 을 가득 채운 시절을 그녀 역시 지나온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온 끝에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런데 웬걸, 꽃밭의 한가운데 한 여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초록 눈동자를 가진 묘령의 여인. 그것은 젊은 날의 콘수엘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과거의 자기 자신이다. 그녀가 보는 것은 환상일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러한 환상은 비단 콘수엘로만의 것이 아니다. 때로 우리 역시 과거의 영광을 살아가길 원한다. 뜨거웠던 젊은 날의 사랑을, 고작 한줌의 명예에 가슴 벅찼던 시절을 가슴에 묻어두곤 때때로 꺼내보며 미소짓길 바란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 자칫 <그때 저기>의 '나'가 아닌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을 묻어둔다면 어떠할까. 바로 그 순간 <아우라>는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낸다, 아주 아름답고 고혹적인 자태로. 하기야 동경되어지는 대상은 동경의 크기에 힘입어 제 몸집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데 익숙한 법이 아닐까. 그렇다. 아우라는 콘수엘로였다. 아름다웠던, 뜨거웠던, 정력적이고 활발발한 <그때 저기>의 콘수엘로였다. 과거에 대한 콘수엘로의 향수가, 관념이, 집착이 아우라를 빚어낸 것이다. 하지만 아우라는 더이상 콘수엘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날카로운 단절 속에서 그 둘은 일말의 연속성을 잃은 채 서로에게서 바삐 달아난다. 좀 더 엄밀히 말한다면 아우라의 일방적인 폭주랄까. 본래 동경이라는 것이 그렇다. 어릴 적 첫사랑을 떠올려보라. 그 시절 우리가 동경했던 소년/소녀는 과연 실체와 얼마나 가까웠을까. 우리로부터 동경되어졌던 소년/소녀는 바로 그 동경의 크기와 더불어 <원본>과는 상관 없는 <이미지>로 비약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 이미지는 원본으로부터 끝없이 탈주하며 그저 우리의 상상 속에서나 완성되는 관념적인 존재로 전락했을 것이다. 아우라도 마찬가지다. 이름부터가 원본의 비본질적 요소를 상기시키는 듯한 <아우라>는 콘수엘로이면서 콘수엘로가 아니다. 콘수엘로의 원본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콘수엘로이고, 원본으로부터 동경되어진다는 그 비연속성 속에서 둘은 하나일 수 없을 것이다. 하기야 펠리페와 정사를 나누던 순간의 그녀는 아우라거나 콘수엘로였지, 동시에 둘인 적이 없다.





<감정수업>의 저자 강신주는 <동경>에 관하여 '지금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나 충동'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말대로 동경되어지는 대상은 늘 내가 건널 수 없는 <저 건너편>에 존재한다.하지만 이는 결코 우연적인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필연적이라고 해야 옳다. 바로 그 거리감으로부터, 단절성으로부터, 비연속성으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대상을 동경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의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친구가 어찌 내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익숙하고 친숙한 관습적 세계를 동경하지 않는다. <이국적>이라는 말이 <우월성>을 함축한다고 착각하는 여느 세인들의 경우처럼, 우리는 이질감으로부터 동경의 이유를 찾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당당히 서지 못할 것이다. 꽃이 만발했던 과거를 좇느라 실은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도 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니 말이다. 화려한 아우라를 제끼고 기꺼이 원본을 직시하도록 하자. 베일은 벗겨졌고, 아우라는 죽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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