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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21. 2021

당신의 욕망에
얼마큼 솔직해질 수 있나요?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한병철이 그의 주저 『피로사회』를 열어젖히며 읊조린 첫 대목이다. 나는 이를 변용하여 과감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에 고유한 만큼 빅토리아적이다, 다소간 차이가 있을 뿐.'



아다시피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에 이르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를 일컫는 시기로 영국 역사상 최번영을 구가한 세대로 설명된다. 흥미롭게도 문학이나 철학에서 빅토리아 시대에 주목하는 시대적 키워드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억압>이다. 요컨대 빅토리아 시대는 <억압된 욕망의 시대>이다. 제국주의를 통해 쌓아올린 범국가적 <부>는 귀족주의라는 영국의 문화적 특수성 속에서 필시 불균형--귀족과 하인--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귀족 계층은 그들의 우월함을 입증해줄--혹은 부드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 자신을 다른 계층과 <구별짓기> 위한--일종의 <코드>를 생산하여 <욕망>을 감추려 시도했다. 예컨대 성욕이 부정되었고, 분노가 부정되었고, 갈등이 부정되었다. 그것들이 귀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코드란 <형식적 예의>와 다름아니며 달리 말하자면 <욕망의 억압>이다. 즉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코드는 <가면>을 걸친 신사숙녀들의 <속내 가리기>라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빅토리아적 특질은 오직 빅토리아 시대만의 것이 아니다. 앞서 선언했듯 '모든 사회는 그 시대에 고유한 만큼 빅토리아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시대에는 그 나름의 욕망과 억압이 존재한다. 욕망의 '내용'과 억압의 '정도'만 다르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 모든 시대는 빅토리아적이라는 속성을 다소간 공유하는 셈이다.


어쩌면 이러한 설명은 <사회>의 속성을 길게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사회가 <욕망을 간직한 개개인의 집합>이라고 정의된다면, 또한 여기에 <개인의 욕망은 사회 유지에 해롭다>라는 성악설을 더한다면, 필연적으로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쪽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논점은 모든 시대가 저들만의 억압 기제를 발휘한다는 점이며 따라서 우리는 다소간 욕망을 억압당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회적 가치의 은밀한 내면화 속에서 우리는 억압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부정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타인의 욕망마저 여지없이 짓밟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빅토리아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함부로 솔직한 욕망을 드러냈다가는 주변의 눈총을 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예외는 아니다. 부부도 아닌 사이에 감히 프랑스 장교와 밀통을 행했으니 어찌 시대적 손가락질을 피하랴. 하지만 그녀는 기꺼이 욕망을 드러냈다. 우리 모두 <사회적 자아>만 드러내기로 약속한 시대에 감히 <참자아>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들이 치뤄야할 대가는 결코 작지 않다. 그녀는 남의 가정을 파탄낸 창기로 낙인찍혔고, 이로써 그녀의 <사회적 자아>는 사망했다. 과연 생존을 위한 <평판 관리>가 필연적인 이 사회에서 당신은 어떠한 욕망을 숨기고 있는가. 내밀한 욕망에 잠시 눈을 감고 적어도 속으로나마 잠시 정직해지기를 권면하는 오늘의 책, 존 파울즈의 역작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








연인 한 쌍이 등장한다. 남자의 이름은 찰스 스미드선, 화석 수집을 애호하는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이며, 그의 조부는 준남작이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를 지낸 상류층 특유의 <계급 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그의 의복, 말버릇, 가치관 등이 이를 방증한다. 예컨대 그의 의복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기표와 다름아니며, 속내를 감춘 채 예의와 형식으로 점철된 그의 말버릇, 내면의 요동치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는 그의 가치관이 그러하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빅토리아 시대를 상징하는 <화석> 그 자체였던 것이다. 여자의 이름은 어니스티나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에게 으레 부여되었던 의무, 즉 남성에게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복종의 코드를 따르지 않는 당돌한 여성이다. 또한 욕망을 표현하는 데 비교적 솔직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점에서 그녀와 찰스의 관계는 그 시작부터 균열--새드앤딩--의 조건을 간직한 관계이다. 어쩌면 작가 존 파울즈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으로 보이는 찰스와 그 반대편에 선 어니스티나의 관계를 소설 전면에 그림으로써 시작부터 빅토리아 시대의 전복을 꾀한 것이 아닐까. 어니스티나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다. 또한 그가 쌓은 재산에 대단히 자부심이 큰 인물이다. 다만 그가 당대의 상인들이 감내한 <시대적 눈초리>로부터 벗어나고자 자신의 딸을 찰스에게 시집 보내는 대목은 그의 자부심이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 더 익살스럽게 해석한다면, 그 잘난 <신분>마저도 <돈>으로 획득 가능한 시대적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잘난 두 남녀--찰스와 어니스티나--는 약간의 사랑과 그보다 좀 더 묵직한 이해관계, 그리고 막중한 의무에 떠밀려 결혼을 약속한 보통의 연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여인이 등장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늘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살아온 세월의 거친 굴곡을 아주 일부만 드러내 보일 뿐임에도 흑암이 자욱하다. 소문에 따르면 그녀는 전에 지내던 곳에서 한 <프랑스 장교>와 밀통을 하여 쫓겨났다고 전해진다. 하기야 때는 바야흐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에도 성적 접촉이 금기시되던 빅토리아 시대가 아니던가. 그녀에겐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혔고, 이내 그녀의 삶은 <부정한 삶>으로 규정지어졌다. 즉 그녀의 안면에 드리운 그늘은 시대의 <인습>이자 <규율>인 셈이다. 그녀는 바로 머지않아 찰스가 사랑해 마지않을 여인, 사라 우드러프다.







장장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이지만 줄거리만 간추리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결혼을 앞둔 찰스와 어니스티나가 그들 앞에 나타난 사라 우드러프로 인해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하지만 소설이란 언제나 줄거리 이상의 것이고, 특히나 존 파울즈의 소설은 더욱 그러하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작품의 매력을 고양했으며, 아울러 그것은 고작 기교를 위한 기술(description)이기보다 세계를 위한 서술(narration)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 중위의 여자> 전반에 드러나는 존 파울즈의 전위적인 서술 방식은 단지 실험적 정신의 소산을 넘어 찰스와 사라의 세계를 현실에서 새로이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때 독자는 그 <현실적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제작자로 '초대' 받는다. 예컨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존 파울즈는 독자를 위해 여러가지 결말을 제시하며 작품을 끝맺는데, 바로 이때 독자는 자신의 삶속에서 찰스의 세계를 상상하여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난 <초대> 이외에도 존 파울즈는 독자들에게 끝없이 손을 내민다.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자신과 무관한 세계를 관음적으로 바라보는 무의미한 도착증을 허락 받지 못한다. 그에게 소설은 독자의 적극적인 파괴로부터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다.






사회학 이론 중 <낙인효과labelling theory>라 불리는 개념이 있다. 이는 특정 대상에 부정적인 편견이 입혀지면 특정 대상의 속성이 실제로 그렇게 되거나, 나아가 특정 대상이 그러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뜻한다. 예컨대 'A는 문란하다'라는 평판에 관하여 A가 실제로 자신의 속성을 문란하다고 <자기 인정>하게 되거나 혹은 자포자기하는 사례가 예가 될 것이다. 사라는 어떠한가. 그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고 낙인찍힌다. 시대적 뉘앙스를 한껏 살려본다면 '프랑스 장교와 놀아난 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평판을 경쟁력으로 살아가는 상호 감시의 빅토리아 시대에서 그러한 추문은 사라의 삶을 잿빛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실 사라는 중위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갈갈이 찢은 끔찍한 낙인이 실은 허구였던 것이다. 그녀는 왜 얼토당토 않은 추문에 맞서 스스로의 떳떠함을 항변하지 않았던 것일까. 흥미롭게도 이에 대해서는 억압이라는 키워드를 기준으로 정반대의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사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심층 구조를 잠식하고 있는 저 억압이라는 <괴물>로부터 초연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사라는 타인의 기준에 복종하는 <노예>이기보다 스스로 기준을 생성하는 <고귀한 자>인 셈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자긍심'과 '자신감'의 차이를 기준의 주체라고 설명한다. 먼저 '자긍심'이란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겨지는 정당한 관념과 기준을 생성하고, 그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며, 또한 그러한 노력이 일정 부문 성공을 이루었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는 몇 년 전 심리힐링 서적들에서 반짝 인기를 끌었던 '자존감'이라는 키워드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에 반해 '자신감'의 기준은 늘 타인이 만든 기준, 세상이 만든 기준에 있다. 따라서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은 겉보기엔 활달하고 건강한 자아를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한시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내적 세계에서 황홀감을 맛보며 '자긍심'을 느끼는 사람과 달리 오직 자신의 외적 세계만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즉 사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기준에 복종하는 노예이기보다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이는 <고귀한 자>일지도 모른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해석은 작품의 중후반부에 걸쳐 묘사되는 사라의 면모, 예컨대 그녀가 그녀를 향한 찰스의 마음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작품에서 드러난 그녀는 자신의 내면 세계로부터 스스로 충분한 위로와 휴식을 자족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물론 자신의 내면에 거하는 삶이 꼭 타인과 독립되어 홀로 살아가는 고독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단지 그가 찰스에게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라가 스스로 공급해야 할 위로의 몫마저 찰스에게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사라가 자신의 내적 세계 안에서 스스로의 고유함을 생성해내는 존재라고 판단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훗날 찰스라 사라의 거짓말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가능한 해석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라가 실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억압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 사라를 둘러싼 사람들은 사라의 죄를 <몸>으로부터 찾고 있다. 육체적 관계를 가졌으므로 부정하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사라는 프랑스 장교와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 사라는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부터 찾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정당한 관념 안에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는 사람이, 즉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이 찰스에게 그토록 대담한 사랑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로하여금 사라가 대단히 이기적인 인물이거나, 혹은 이율배반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과연 그녀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고민 속에서 우리는 화두를 바꿔볼 수 있다. 어쩌면 사라의 행동은 그 자체로 깊이 탐구되어야 할 본질적 주제이기보다 다만 그에 대한 찰스의 반작용을 불러오기 위한 <물음>은 아닐까?








찰스의 취미는 화석 수집이다. 화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래된 것이고, 죽어 있는 것이다. 역동하는 생명력의 반대편에 서있는 그 무엇이다. 찰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살아있지만 죽어 있다. 자신의 깊은 곳에다 내밀한 감정과 욕망을 쳐박아둔 채 그저 시대의 의무를 살아갔다. 공명심을 살아냈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기꺼이 착각했다. 틀림없이 그는 깨어 있지만 더욱 틀림없이 그는 잠들어 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눈을 뜬 건 사라를 보고난 후다. 처음엔 그저 사연 있는 부박한 여인인 줄만 알았다. 아직 찰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형식주의를 고스란히 간직한 화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조금씩 찰스의 삶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사라의 모험심과, 정열적인 대담함, 시대를 살아가지 않는 그 초연함이 찰스의 내면에 깃든 반성적 자아를 드디어 깨운 것이다. 그 이후 작품은 찰스 내면의 줄다리기, 즉 의무와 자유가 벌이는 각축의 서사시로 변모한다. 관습과 욕망의 쟁투가 벌어진 것이다. 존 파울즈는 『아리스토스』에서 말했다. "실존주의는 모든 사상의 체계나 심리학 이론들, 그리고 사회, 개인성을 강탈하려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개인적 저항이다." 찰스는 관습에 물든 존재였다. 이때의 찰스는 결코 저항의 주체일 수 없다. 그는 저항의 대상을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저항하려는 세력들을 막아서는 권력 주체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찰스는 귀족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사랑은 관습적 질서들에 균열을 내고 만다. 그간 당연시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과연 정말 필요하냐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랑 앞에서 제도는, 관습은, 통념들은 다시금 그 의미를 반문당하고, 숙고되며, 해체된다. 애초에 욕망은 억압될 수 없었다, 찰스가 바라본 사창가의 붐비는 행렬이 방증하듯.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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