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론』, 세네카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lmjeTAkJPcI&t=42s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는 이른바 <광폭한 여신들>로 불리곤 했습니다. 그들의 기괴한 외양은 둘째 치고 그들이 사람들에게 가하는 형벌이 무척이나 끔찍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에리니에스의 복수는 결코 무고한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죄 지은 사람들에게만 분노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복수는 죄에 관한 복수였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훗날 그들의 별칭이 <자비로운 여신들>로 바뀐 것은 몹시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필요한 <자비>는 죄를 무조건적으로 덮는 <관용>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벌하는 <분노>라는 해석이 녹아 들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에 대해 분노는 분노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했던 철학자가 있습니다. 분노의 무용론을 과감하게 주장했던 오늘의 책, 세네카의 <분노론>입니다.
분노에 대한 세네카의 설명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초기 스토아 철학자 크리시포스의 <정념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시포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념은 다음의 세 단계—인상, 동의, 의욕—로 발전합니다. 첫째로 <인상>이란 외부 자극에 대한 우리의 수동적인 인식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누군가 우리에게 선물을 준다거나, 혹은 타인이 나를 험담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때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해서 좋다/나쁘다 등의 판단을 내리지 않은 상태이며, 그저 나에게 특정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수동적으로 인지했을 뿐입니다. 가치론적인 판단이 이뤄지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인 <동의>의 단계이죠. 이때 우리는 자신의 이성적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그 사건의 속성이 <좋음>인지 <나쁨>인지를 이성적으로 숙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판단이 완료되면 우리는 ‘좋은 사건’을 <추구>하고, ‘나쁜 사건’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죠. 바로 그러한 감정의 경향성을 <의욕>이라 합니다. 이러한 크리시포스의 <정념론>은 분노에 관한 세네카의 입장에서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먼저 우리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인상>을 인지하게 되고,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부당한 사건이라고 <동의>하게 되며, 그 결과 우리는 분노를 <의욕>하게 되는 거죠.
이러한 세네카의 분노론에서 우리가 주목할 특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세네카는 분노가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컨대 <동의>하지 않은 감정은 <의욕>되어질 수 없다는 설명이죠. 즉,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건이 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분노는 늘 이성적으로 통제 가능한 감정이라 할 수 있는 걸까요? 이를 뒤집는 두 번째 특징은 정념의 <습관성>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정념에 물들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분노를 자주 의욕하는 사람들은 분노라는 정념 자체에 물들어버리게 된다는 설명이죠. 이때 인간은 앞서 언급한 분노의 과정에서 2단계를 건너뛰고 인상과 의욕만 경험하게 됩니다. 세네카가 경계했던 것도 이처럼 분노라는 정념 자체에 물들어버린 사람, 즉 이성적 <동의>의 능력을 상실한 채 그저 외부의 <인상>에 반응하여 습관적으로 분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이러한 정념으로서의 분노는 어떤 부작용을 지니고 있을까요?
첫째로 분노는 잔혹한 결과를 불러오기 쉽습니다. 예컨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거리에서 살해한 것도, 혹은 메데이아가 자신의 남동생을 참혹하게 살육한 것도 모두 분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세네카는 말합니다. “분노는 사소한 것으로 시작하여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즉 분노라는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사소한 <인상>에 대하여 너무나도 큰 대가를 지불한다는 설명이죠. 두번째로 분노는 통제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이는 마음에 관한 스토아 철학의 입장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이란 자주 향하는 쪽으로 물들기 쉽다고 설명되곤 하죠. 쉽게 말해 이성을 좇는 인간의 마음은 이성으로 물들고, 정념을 좇는 인간의 마음은 정념으로 물들기 쉽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시때때로 분노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국 분노라는 정념으로 물들어 나중엔 이성의 동의 없이도 분노를 의욕하게 되는 만성적 분노 단계 이르게 됩니다. 이 단계에 속하는 사람들은 정작 분노하는 이유를 모르면서도 습관적으로 분노하게 됩니다. 세번째로 분노는 실리적이지 않습니다. 즉 분노는 유익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설명이죠. 이에 세네카는 말합니다. “분노하는 자는 진실이 그의 의지에 반할 경우 진실 자체에 더 분노하게 된다.” 즉 분노하는 사람의 관심은 문제를 잘 해결하여 유의미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분노하는 것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세네카의 주장을 요약하면 분노하는 것은 그 결과가 잔혹하고, 또한 통제 불가하며 게다가 실효성도 없으므로 우리의 마음에서 분노를 제거해야 한다는 설명이죠. 그렇다면 분노는 어떻게 제거되어질 수 있을까요?
마음 속의 분노를 다스리는 첫 번째 노하우는 분노를 유예하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분노의 발전 단계에서 인간은 분노를 의욕하기 전에 먼저 분노할 만한 상황인지 아닌지 숙고하는 동의의 단계를 거친다고 이야기되었죠. 하지만 세네카에 따르면 외부의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할 경우 우리는 미처 <동의>하지도 않은 분노를 <의욕>하게 된다고 설명됩니다. 이처럼 <인상>과 <의욕> 사이의 시간이 너무 짧을 경우 우리는 잠시 분노를 유예하여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죠. 이어서 두 번째 방법은 아파테이아(apatheia)적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풀이하면 <무정념>, 즉 정념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단 분노의 제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스토아 철학자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과연 정념이란 어떻게 제어될 수 있는 걸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아디아포라>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아디아포라는 <차이가 없는 것>을 뜻하는 희랍어로, 쉽게 말해 비본질적인 실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아디아포라에 본질을 덧씌우곤 하죠. 예컨대 <빈곤>과 <부귀>는 그 자체로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즉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디아포라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각각을 불행과 행복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이성만이 존재할 뿐이죠. 이처럼 아디아포라를 통해 스토아 철학자들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질병이 있냐 없냐,와 같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러한 외적의 조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내면의 수양>에 달려있다는 이야기이죠. 따라서 삶의 고통은 <차이가 없는 것>을 <차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인간의 마음은 거짓된 정념에 물들거나 헛된 분노에 사로잡히곤 하죠. 즉 정념의 부재를 지향하는 아파테이아적 삶이란 행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아디아포라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세네카의 <분노론>을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그의 논조에 따르면 분노는 잔혹하고 통제 불가하며 게다가 실리적이지도 않으므로 따라서 우리 마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설명되죠. 물론 그러한 세네카의 의견은 일면 타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커다란 분노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혐오 사회라 할 수 있으니 말이죠. 예컨대 남혐과 여혐, 노인 혐오와 유아 혐오, 나아가 특정인에 대한 무차별적 혐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마치 분노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분노의 화신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분노들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도리어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어버리곤 하죠. 그런 의미에서 세네카의 <분노론>은 의미 없는 분노가 들끓는 시대에 꼭 필요한 처방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말해 스토아 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열성적인 <지식인>의 모습이라기보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소극적으로 인내하며 개인적 인격의 성장에만 관심을 갖는 <수양자>의 모습이라는 설명이죠. 물론 이러한 러셀의 견해 역시 충분히 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스토아 철학은 딱히 분노할 이유가 없는 여유로운 생활 조건이 허락된 사람에겐 매력적인 자기 수양이 될 지 모르지만, 오직 분노 밖에 자기 방어 수단이 없는 약자들에겐 사변적인 철학으로 전락하기 마련이죠. 또한 <분노>를 반대하고 <용서>를 권면하는 스토아 철학의 입장은 개인적 차원에선 인격의 도야를 위한 탁월한 실천 윤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만약 사회적 차원의 구호로 이용된다면 자칫 <복종>의 코드로 이용될지도 모릅니다. 즉 정의로운 분노가 부정되고 오직 인내와 순종만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노예들의 사회가 펼쳐지는 거죠. 아무쪼록 외부의 <인상>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이성적 숙고와 그에 적절한 <동의>, 그리고 열정적인 <의욕>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사회를 소망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