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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거릴 지언정 밟지 않고는

영화 <그래비티>, 알폰소 쿠아론

by 혜윰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1zZSIMUrSGI




벌써 두어달 쯤 지났을까. 운동을 하려고 장만한 턱걸이 기구가 외로이 방안을 지키고 있다. 호기롭게 한 번 매달리자마자 생생하게 느낀 내 몸뚱이의 비루함. 참 무겁더라. 그렇게 한참을 낑낑대다가 다소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몸이 가벼 웠다면 턱걸이를 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 얼마나 우스운 생각인가. 설령 몸이 가벼워져서 턱걸이를 수월하게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턱걸이를 하는 이유는 몸무게를 이겨내고 오를 근육을 키우기 위함이지, 그저 턱을 봉에 걸기 위함은 아니니 말이다.


설혹 중력의 영향이 더 적었다면 턱걸이를 훨씬 수월하게 했을 테지만, 반대로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금은 힘겹더라도 나의 초라한 근육들이 더 잘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뼘이라도 자라기 위해서 고통이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행복이 무럭무럭 자라기 위한 최적의 환경은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환경이 아니라, 다시 말해 불행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진공상태가 아니라, 때로 우리를 무너뜨릴 법한 불행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그런 환경은 아닐까 싶다.


영화 <그래비티>는 삶에 닥친 불행의 무게와 그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보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인생의 의미를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한다.


영화의 감독은 2018년 <로마>라는 작품으로 전세계 영화제를 휩쓴 멕시코 출신의 알폰소 쿠아론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학부 시절 철학을 전공한 것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집필하는 각본마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을 녹여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오늘 살펴볼 그의 영화 <그래비티>는 감히 그의 영화 중 정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삶에 대한 진한 철학이 묻어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Gravity를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SF 영화라고 소개가 되어 있다. 뭐, 영화가 진행되는 90분 내내 우주를 떠도는 주인공의 모습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SF 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지만 내 생각에 <그래비티>는 그저 SF를 조금 곁들인 ‘성장’ 드라마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Sf는 거들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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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플롯은 무척이나 간단하다.


주인공은 라이언 스톤 역을 맡은 산드라블록과 맷 코왈스키 역을 맡은 조지 클루니다.


이 둘은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우주 멀리서 폭파된 인공위성 잔해에 부딪히는 사고를 겪게 된다. 이 사고로 팀원들은 모두 죽고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만 살아 남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둘은 위태로웠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무중력 공간에서 둘은 겨우 끈 하나만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둘은 서로를 잇고 있는 그 끈마저 잘라내지 않으면 둘 다 죽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불행히도 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끈을 잘라내지 않으면 둘 다 죽고, 끈을 잘라내면 산드라만 살아남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에 조지 클루니는 망설임 없이 끈을 잘라내려고 했지만 산드라 블록은 이를 쉽게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 조지 클루니가 내뱉은 대사가 참 일품이다.


"라이언, 놓아주는 법도 배워야 해."


이후의 줄거리는 산드라 블록이 여러가지 위기를 극복하고 끝내 우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하는 모습을 그려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을 생략하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야기의 구성이 참 간단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우주로 떠난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한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이렇게 간단한 서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 그리고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서사 이면에 감춰진 인생에 대한 은유가 너무나도 철학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맨 먼저 주목한 것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gravity, 즉 중력이 가지는 이중성에 대한 고찰이다. 영화 초반 산드라 블록이 속한 팀은 인공위성 잔해에 휩쓸리는 사고를 겪는다. 이는 중력의 폭력성을 의미한다. 중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공위성 잔해들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대원들을 덮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력의 폭력성은 이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도 수없이 목격된다. 가령 낙사라던가, 비행물체들의 연이은 추락 사고 등등 지구는 무수한 물체들을 집어삼킬 듯 빨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중력이 그토록 폭력적이기만 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이 지금 이순간 안전하게 땅에 발붙이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중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즉 중력이란 때로는 인간의 삶에 파멸을 가져다 줄 만큼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평상시에는 인간의 지지 기반이 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주로 가보자. 무중력 공간인 우주는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이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우주는 중력의 폭력성이 제거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영화 속에서 산드라 블록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우주비행에 나선 것은 딸을 잃은 아픔이 너무 버겁고 짐스러워서,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딸을 잃은 아픔으로부터 헤어나오고 싶어 저 먼 우주로 떠나온 것이다. 다행히도 우주는 그녀의 생각만큼이나 평온하고 고요해 보였다. 심지어는 고요를 넘어선 적막, 적막 이상의 무(無) 그 자체였다.




하지만 평온할 줄만 알았던 우주의 고요함은 결코 그녀에게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우주에서 산드라 블록은 멀어져만 가는 조지 클루니를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력이 부재한 우주는 도리어 서로를 끌어당겨줄 그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공간일 뿐이었던 셈이다.


나는 이를 통해 알폰소 쿠아론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중력을 느낄 수 없는 우주의 허망함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지구적 삶으로 눈돌리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자명하게도 지구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다. 이는 곧 중력이 가져다주는 폭력성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는 공간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고마운 중력의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력이 의미하는 바를 다소 거칠게 ‘고통’이라고 번역해본다면, 인간은 결코 한시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고통은 언제나 한결같이 인간을 잡아당기지만, 비로소 인간은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설 때야 말로 삶을 살아낼 수 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말미 산드라 블록은 마침내 지구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착륙 후 그녀가 처음으로 밟아선 곳은 꽤나 질척여 보이는 땅이었다. 아무리 땅이 질척거릴 지라도 밟고 일어서는 수밖에 없듯이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삶을 질척거리게 만드는 수많은 고통들을 당당히 직면하는 수 밖에 없지는 않을까하는 감상이 든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피투된 존재, 즉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한다. 이처럼 스스로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피투적 인식은 특히나 우리가 고통이나 불안에 직면할 때 더 선명하게 자각되곤 한다. 그러한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이 삶에 뛰어든 존재라는 기투적 인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기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며,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의미있는 행동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워야 하리라.


P.S : 중력이 상징하는 바를 자유롭게 감상하는 것도 이 영화를 재밌게 관람하는 방식이 되리라 생각한다. 가령 내 친구는 중력을 인간관계로 해석하더라. 때로 우리의 마음을 속수무책으로 짓밟는 인간관계가 역설적으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중력이 아닐까 하는 감상이다. 뭐, 우주에서 멀어져만 가는 조지클루니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던 산드라 블록의 무기력함을 염두에 둔다면 꼭 부적절한 감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래비티>를 통해 당신의 삶에서 중력이 무엇인가 고민해보는 귀한 경험을 해보길 바라며, 끝.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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