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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은 사랑의 미덕일까?

영화 <클로져>, 마이크 니콜스

by 혜윰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_mNL5-s18Mo&t=26s



어느덧 1월 한 달도 다 지났다. 바람이 세질수록 더욱 꽉 부둥켜안는 거리의 연인들을 보고 있자면 지금 솔로인 사람들은 특히나 연애 생각이 간절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너무 걱정은 말자. 사랑은 아주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교통사고 같으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또 방심은 금물이다. 느닷없이 찾아왔던 낯선 사람은 다시 낯선 사람이 되어 떠나가기 마련이니까.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는 시시때때로 낯선 사람과 사랑에 빠지곤, 또 이별해서 낯선 사람(=남)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사랑에 한창 빠져 있는 순간에도 간혹 상대방이 아주 낯설게 느껴져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나만 그런가?).


아무튼, 오늘의 영화 <클로져>는 사랑과 낯설음에 대한 웃픈 고찰이 담긴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네 명이다. 주드로와 나탈리 포트만, 그리고 줄리아 로버츠와 클라이브 오웬.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극 중 이름이 아닌 배우들의 본명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영화의 시작은 미국 출신의 전직 스트리퍼 댄서인 나탈리가 런던 도심을 걷던 중 영국 남자 주드로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잠시 후, 나탈리는 미국과는 다른 영국의 교통 체계가 익숙하지 않았는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놀라서 달려온 주드로에게 던지는 나탈리의 대사가 참 인상적이다.


"Hello, stranger?"


헬로 스트레인져. 안녕 낯선 사람?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아무튼 나탈리에겐 낯선 사람과의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아주 갑작스럽고 느닷없이 찾아왔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주드로는 한 스튜디오를 방문한다. 본업이 부고 기사를 쓰는 것이었던 주드로는 꿈에 그리던 소설가 등단을 앞두고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웬걸, 사진 작가 줄리아 로버츠를 본 주드로는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후의 줄거리는 여기에 클라이브 오웬이 보태지며 네 남녀가 얽히고 설키는 치정 이야기로 흘러간다.


여기에 스포가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보태자. (사실상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기도 하니 혹여나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여기서 더 읽을지 말지 알아서 결정하시길.)


내용은 이렇다. 영화 초반 자신의 이름을 묻는 주드로에게 나탈리는 ‘엘리스’라고 답한다. 이윽고 주드로와 이별 후 클럽에서 스트리퍼 일을 하던 나탈리는 손님으로 찾아온 클라이브 오웬을 마주친다. 그런데 나탈리를 알아본 클라이브 오웬이 이름을 묻자 그녀는 ‘제인’이라고 답한다. 이미 나탈리와 구면이었던 클라이브 오웬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스트리퍼로 일하는 걸 들킨 나탈리가 창피해서 지어 낸 거짓말 정도로 여긴 것이다. 따라서 클라이브 오웬은 제인이라는 이름이 스트리퍼로 활동할 때나 사용하는 예명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나탈리에게 계속 이름을 캐묻지만 끝까지 나탈리는 제인이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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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미 밝혀진 나탈리의 진짜 이름은 놀랍게도 제인이 맞았다. 이로써 주드로는 나탈리의 이름조차도 모르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왜 나탈리는 사랑했던 주드로에게 고작 이름 하나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일까? 이는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에게 매우 혼란스러운 지점이었다.


그럼 이제 영화 너머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연애했던 시절을 한 번 떠올려 보라.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던 아주 낯선 사람과 손을 마주 잡고, 공원을 거닐고, 아무에게도 말 못할 나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들이 말이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다(closer) 보면 이 사람이 한 땐 나에게 stranger였다는 사실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고는 상대가 아주 익숙한 나의 일부, 내가 정말 잘 안다 라고 생각하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 다툼이 생기고, 균열이 발생하며 끝내 이별에 이르고 나면 다시금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처럼 우리는 낯선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 낯선 사람으로 돌아가는 일을 숱하게 겪어왔다. 더욱 슬픈건 한참 사랑에 빠졌을 때도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상대방의 모습이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이 사람을 잘 안다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아주 낯선 모습이 발견되는 것이다. 왤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로 초점을 바꿔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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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상대방에게 보여주는가?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상대방에게 사랑받기 위해, 혹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상대방이 사랑해주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나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상대방에게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만들어진' 우리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선 나 스스로에게도 ‘낯선 사람’일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나탈리가 주드로에게 자신의 본명을 말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나탈리가 꾸며낸 가짜 이름은 숭고한 희생을 치른 한 소녀의 이름이었다. 즉 나탈리는 상대에게 ‘꾸며진 나’,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계의 진전을 기대했던 것이다. 실제로 나탈리는 주드로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나서야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고백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슬프게도- 사랑을 지탱하는 것은 약간의 거짓, 혹은 그 거짓으로 꾸며진 낯설음은 아닐까?


아무튼 사랑에 한창 빠졌을 때도 가끔씩 상대가 낯설게 느껴지는 원인은 애초에 꾸며진 나를 보여주었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들통나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질문에 가닿는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낯선 모습으로 시작해서 낯선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참고로 영화 속에서 주드로의 직업은 부고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한편으론 소설가가 되길 꿈꾸기도 했지만, 힘들게 펴낸 책이 흥행에 실패하며 크게 좌절한 바 있다. 여기서 두 직업의 본질은 아주 다르다. 부고 기사를 쓰는 일은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것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다. 반면 소설가란 없는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사람들이다. 이야기를 잘 지어낼수록 훌륭한 소설가가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주드로가 성공한 소설가가 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사실’에 집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주드로는 ‘난 진실을 원해’라는 말을 무수히 내뱉는다.


이로써 우린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꾸며진 나를 보여주는 것일까. 전자는 주드로가 추구했던 사랑이다. 사실에 집착했던 주드로는 나탈리에게 사실을 알려달라며 강요했지만, 정작 나탈리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했다는 사실을 안 뒤에는 감당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꾸며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나탈리의 사랑이 옳은 것일까? 물론 이 또한 답은 아니다. 지속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꾸며진 나'만 보여줄 만큼의 체력을 가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할까.




이 딜레마에서 나를 구원해준 것은 다름 아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이다. 소설 <정체성>에는 장마르크와 샹칼이라는 부부가 등장한다. 어느날 샹칼은 남편 장마르크에게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며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어가는 것 같다는 두려움을 고백한다. 남편 장마르크는 아내 샹칼의 자존감을 북돋아주고 싶은 마음에 익명을 빌어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의 내용은 이런 식이다.


“나는 아주 멀리서 그대를 지켜보고 있소. 그대의 진주목걸이는 무엇보다도 영롱하게 빛납니다. 그대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런 편지를 받은 샹칼은 처음엔 불쾌함을 느꼈지만, 점차 편지에 적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더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그러곤 그 모습들을 사랑하게 된다. 즉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익명의 발신인이 발견해준 것에 설렘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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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는 이를 통해 <클로져>로부터 발생한 딜레마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엿봤다. 애당초 사실만을 보여주건, 꾸며진 나를 보여주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랑의 본질은 내가 무엇이 되려하느냐는 것보다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해줄거냐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사실만을 보여주건, 꾸며진 모습을 보여주건 하는 따위의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그(녀)의 가치를 내가 발견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문해야할 질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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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나는 영화의 제목 stranger를 두 가지 맥락에서 정의 내렸다. 하나는 허구적 stranger, 또 하나는 생성적 stranger이다. 허구적 stranger란 나탈리가 주드로에게 거짓을 고한 것처럼, 사랑받기 위해 ‘가공한 ‘나’를 뜻한다. 따라서 주드로는 나탈리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공된 나탈리’, 즉 stranger였던 셈이다. 이에 반해 생성적 stranger란 상대방이 발견해준 나의 모습, 하지만 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나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주는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조각과도 같지 않을까.


이미 완성된 재료 그 자체로서 서로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완성되어 가는 나, 또한 상대가 발견해주는 나의 가치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으로 빚어질 수 있는 충만한 가능성을 품은 상태, 그것이야 말로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쪼록 사랑하는 상대방이 요즘따라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으니, 시간 날 때 한 번 보시기를.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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