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카>, 앤드류 니콜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mtjprpPhQts&t=328s
인생을 살아갈 때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로 자주 권장되는 덕목들이 있다. 가령 열정이라던가, 인내심, 혹은 결단력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중에서도 영화나 소설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덕목 중에 하나는 바로 ‘극복’이라는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오늘 살펴볼 영화 <가타카>는 바로 이 ‘극복’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랄 수 있다.
<가타카>는 1997년에 개봉된, 다소 오래된 작품이다. 감독의 이름은 앤드류 니콜.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열연을 펼친 <인타임>을 연출했으며, <트루먼쇼>의 각본과 제작을 담당하기도 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유전자 하나만 가지고도 사람의 미래를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첨단 과학 시대다. 즉 태어난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만 뽑아도, 이 아이의 수명은 몇 살인지, 어떤 병에 걸릴 것이며, 어떤 직업이 적합할 것인지 등이 모두 측정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 빈센트는 별로 좋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의 예상 수명은 고작 서른살 안팎이었으며, 심장 건강이나 시력도 썩 좋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빈센트의 동생, 안톤은 우월한 유전자만 엄선하여 만들어졌다. 다시말해 안톤은 태어났을 때부터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빈센트와 안톤이 상징하는 바가 극명히 대조를 이루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에겐 꿈이 있었다. 바로 우주로 비행을 떠나는 비행사가 되는 것. 꿈을 이루기 위해 빈센트는 우주 항공 회사 가타카에 면접을 보러 가기도 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빈센트의 혈액 샘플을 통해 금새 드러난 그의 유전자는 빈센트가 가타카에서 일할 수 없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던 탓이다. 즉 빈센트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 <가타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모든 능력치가 규정되고, 삶의 등급이 정해진 세상, 그 속에서 각 인물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사실 영화적 상상력을 다소 제거하고 <가타카>의 세계관을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해보더라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별로 좋아하는 비유는 아니지만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프레임만 봐도 그렇다. 이에 대해 유시민 작가는 한 방송에서 상속자본주의라는 표현으로 대신하기도 하더라. 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회적 계급, 혹은 경제적 계급이 정해지는 현실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꼭 경제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외모라던가 국적, 성별 등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요소로 인해 어느정도 한정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가.
이쯤에서 잠시 철학자가 한 명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마 많이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이다. 그가 남긴 말 중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는 인간만이 실존적 존재이며, 사물은 본질적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예를들어, 의자의 본질은 ‘사람이 앉는 것’에 있다. 즉 앉을 수 없다면 본질적으로 그것은 의자라고 할 수 없는 셈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의자를 사정없이 망가뜨려서 도저히 의자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했다면, 이 경우 의자의 존재성은 파괴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모든 사물들이 저마다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본질이 파괴되는 순간 존재성도 소멸한다고 보았다.
반면 인간은 어딘가 조금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즉 인간에겐 미리 규정된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학생이라 해보자. 내가 나중에 직장인이 되어 학생이라는 본질을 잃는다고 나라는 존재가 파괴될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나는 세상과 호흡하며 살아갈 것이며,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삶을 부단히 이어나갈 것이다. 즉 사르트르는 인간이 어떤 본질로도 규정될 수 없는 존재, 모든 본질로부터 초연한 존재라고 바라봤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존재 상태를 실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영화 속에서 빈센트는 비행사를 꿈꿀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빈센트는 이러한 시스템의 불가항력성에 순응하지 않는다. 빈센트는 자신의 본질이 과학자들의 양적인 측정 아래 규정되고, 제한되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사르트르 식으로 해석해본다면 규정된 본질이 자신의 기능이라 여기는 사물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본질을 끊임없이 재창조해 나가는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은 <가타카>를 본 많은 사람들이 꼽는 명대사다.
“내가 널 이긴 이유는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야”
이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세상에 맞선 빈센트의 정신력을 잘 보여주는 대사다. 그렇다면 ‘극복’이란 이와 같은 필사의 정신,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이 대사에서 영화가 그쳤다면 <가타카>라는 영화는 그저 ‘불굴의 의지’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 의식에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더 빛나는 이유는 영화 말미에 꿈을 이룬 빈센트가 내뱉은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비적격자였기 때문에 영리해질 수 있었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복의 대상이 단지 시스템 뿐이라고 여긴다.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시스템이 만들어낸 기준을 가슴 깊이 내면화한 바람에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체념에 빠져버리곤 한다. 하지만 빈센트는 시스템 그 자체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그 공로를 돌리기까지 한다. 즉 빈센트는 극복의 대상이 다름아닌 시스템이 규정한 나 자신, 그리고 체념해버린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빈센트는 자신의 타고난 운명적 한계 그 자체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삶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빈센트는 이야기한다.
“드디어 나는 꿈에 그리던 우주로 가고 있다. 그런데 고향에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꿈을 이뤄 우주로 가고 있음에도 고향에 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빈센트의 속내는 무엇일까. 지구적 기준 아래 규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실존적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정신이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감독의 메시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한 편으로 이 글을 포스팅하는 마음에 불편한 구석이 있다. 노력, 그 이상의 '노오력' 가지고도 도무지 극복하기가 힘든 현대 사회에서 다시금 이 글마저 노력을 강조하는 것처럼 여겨질까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온갖 힐링 에세이가 난무한 요즘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있자면, 마음만 위로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에 용기를 낸다. 비록 시스템이 문제이고, 또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요소로 차별받고 한정되는 이 세상이 불합리하게 느껴질 지언정, 끝없이 나 자신의 본질을 재창조해가는 실존적 삶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아닐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