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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애는 행복한데 힘들까?

영화 <Her>, 스파이크 존즈

by 혜윰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q2_0ziteVPs




사랑은 왜 그토록 힘들까.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작품 <Her>는 이 질문에 대해 꽤 진지한 숙고의 흔적을 보이는 작품이다. 혹여나 지금 사랑 때문에 힘든 사람, 혹은 아팠던 사람, 아니 행복한 사람들도 이 영화는 한 번 쯤 감상하길 추천한다. 사랑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체감과 단절감, 그리고 그 각각으로부터 체험하는 기쁨과 허무를 절절히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연애경험이 아예 없던 시기에 그런 착각을 했다. 장래에 애인이 생긴다면 난 굉장히 든든하고 멋있는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그런데 막상 현실 연애를 해보니 그렇지가 않더라.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면, 하루하루 나의 속좁음과 옹졸함, 편협함이 튀어나와 다투는 일도 잦았고 때로는 상대를 신뢰하지 못해 크게 싸운 일도 많았다. 그렇게 연애가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가졌던 의문이 바로 서두의 질문이다. 사랑은 왜 그토록 힘들까?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왜 때로는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아프게 하는 존재가 되는걸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진정한 소통이 왜 이토록 힘든걸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가장 큰 고찰을 남겨준 영화가 나에겐 <her>였다.


플롯은 굉장히 간단하다.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나서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교감을 하게 된 대상이 하나 생겼으니 바로 사만다라는 인공지능 어플이다. 핸드폰에 오케이 구글! 하면 실행되는 프로그램의 미래식 최첨단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아무튼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고작 그런 어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표면적인 줄거리는 이것이 전부다. 그렇다보니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상하는 포인트가 무엇인가 하면 “아, 미래에는 정말 인공지능 ai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사랑에 대한 과학적인, 혹은 인문학적인 설전을 벌이는 정도가 고작이다.


난 감히 주장하기를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주제가 인간과 기계의 사랑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보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주제는 진정한 소통에 대한 고찰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의 근거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명의 철학자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찍이 타자를 이렇게 정의 내린 바 있다.


‘타자는 나와 삶의 규칙이 다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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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듣기에는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뭐 저렇게 당연한 말을 구태여 철학자까지 인용하지? 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비트겐슈타인이 내린 타자에 대한 정의는 우리의 직관에 크게 반하지 않는 매우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탠다.


마주침은 타자성에 대한 인식에 선행한다.


무슨말인가 하면, 마주침이 발생해야 비로소 타자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바로 우리의 옆에 선 사람들과 마주쳐야만, 그 사람이 비로소 우리의 타자로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갈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학교를 갈때, 혹은 회사를 가기 위해 올라탄 지하철에서 여러분의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을 떠올려보라. 당연히 당신은 옆자리에 앉은 그 사람이 당신과는 다른 타자 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한 인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옆자리에 앉았던 그 사람이 당신 자기 자신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신체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 저 사람은 내가 아닌 타자구나’ 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타자는 그저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타자에 지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논하고자 했던 타자는 그러한 물리적 의미의 타자가 아니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살펴보자. 편의점에 들어가서 맛있는 딸기 우유를 하나 집어서 계산을 하고 나오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 때 직원을 보며, ‘아 저 사람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하는 타자성을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세계에서 편의점 직원은 그저 당신의 상품을 계산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즉 ‘기능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해석한다면, 당신에게 편의점 직원은 마주침이 발생하지 않은 존재, 따라서 타자성이 발견되지 않은 존재, 즉 당신의 세계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존재, 당신의 세계를 하염없이 부유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 타자에 대한 사유를 이렇게 오랫동안 설명한 이유는 이 영화에서 사만다가 가지는 존재론적인 위상이 바로 절대적인 타자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0과 1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사만다가 살아가는 규칙은 남자 주인공과 너무도 다르다. 한번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소통을 하기도 하고, 그 중 800명이 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남자 주인공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자신과는 삶의 규칙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곤 사만다에게 따져 묻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 기준으로는 납득이 안 돼. 난 너만 사랑하는데..... 하지만 사만다는 이야기한다. 오해하지마. 난 너를 충만하게 사랑해. 난 내가 존재하는 방식안에서, 따를 수 밖에 없는 규칙 안에서 널 거짓없이 사랑해... 이 대화가 과연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대화라고 생각하는가?


남자 주인공은 자기가 가진 합리와 기준, 규칙 안에서 사만다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름 잘 통한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대방과의 현격한 규칙 차이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타인의 규칙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보다는 나의 기준으로 그 규칙을 평가하려 하고, 또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


많이들 들어봤겠지만 불교철학에서는 인간이 소우주와 같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우주와 우주의 만남, 혹은 세계와 세계의 만남에 비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주 작은 접점에서 스치듯 마주칠 뿐이다.


여기에 보태서 인식론자들은 또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우주 밖을 상상하지 못한다' 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겨우 저 작은 점에서 타자와 아주 우연히 마주칠 뿐인데 너무 쉽게 타인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재단하고 평가하고, 또 때로는 붕괴시켜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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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힘든 이유는 겨우 저 작은 점으로 들여다본 타인을 나의 세계관과 나의 합리로 평가하려는 오만함 때문이 아닐까.


이 글을 한 줄로 요약하면 매우 간단하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것.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더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점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의 고단함 그 자체였다. 고단하고 고되지만,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진정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행복을 누리자.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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