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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너)에게로 가는 길

<나와 너>, 마르틴 부버

by 혜윰


짐멜(Georg Simmel)은 그의 유명한 논문 <대도시와 정신적 삶>을 통해 도시인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대도시와 같이 큰 집단이 가진 지적인 삶의 조건들이나 상호 무관심이나 속내 감추기라는 태도를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개인의 자립성이 훼손되곤 하는 작은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라기보다는 대도시처럼 인구가 극도로 밀집한 곳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일 것이다. ……… 대도시의 우글거리는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장 잘 느끼게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이 논문을 통해 짐멜은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커다란 자유를 누림과 동시에 자유의 이면인 고독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시골 사람들의 만남을 '인격적 만남'으로, 도시 사람들의 만남을 '비인격적 만남'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그가 규정한 '인격'에 발끈할 필요 없다. 그저 시골과 도시를 이분함으로써 그가 하고팠던 말은 대도시의 편의점에선 상품과 돈만 오갈 뿐 외상이 불가능함을 뜻할 뿐이라는 것이니 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언뜻 마르틴 부버가 말한 두 근원어 '나-그것', 나-너'의 세계를 보았다. 도시인들에게 타인은 그저 '그것'에 지나진 않을까? 모든 사람과 '너'로서 관계 맺기란 수백만의 인구가 밀집한 도시생태학적 관점에서 애시당초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짐멜 또한 도시인의 비인격적 만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짐멜은 도시인이 수 많은 사람들과 일일이 인격적 관계를 맺는 일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며, 대도시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마땅히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인간상을 분석했을 뿐이다. 문제는 다음 대목에서 발생한다. 짐멜은 인격적 만남의 단절로부터 오는 개인의 고립을 '자유'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마르틴 부버와의 큰 차이가 발생한다. 마르틴 부버가 말한 자유가 무엇인가. 끊임없이 '너'를 말하는 정신으로, 온 존재를 기울여, 현전하는 '너'에게, '성실하게' 다가가, 기어코 거듭난 '나'를 발견하며 실현되는 것으로서 자유를 제시하지 않았는가. 타자는 지옥일까, 천국일까.


타자에 대한 사유는 개인적으로 참 반가운 주제다.(물론, 배움이 깊진 않다.) 학창시절의 나를 소심함으로부터 구원해주었던 것이 바로 들뢰즈(Gilles Deleuze)가 사유한 타자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나'란 존재의 정체성은 결코 '나'에게만 있지 않다. 사랑스러운 조카 덕분에 자상한 삼촌이 될 기회를 얻듯이, 또한 짝사랑 그녀 덕분에 타는듯 애타는 마음을 가져 볼 수 있듯이 나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야 내가 못 보던 '나'를 진정으로 들여다볼 수 있으며, 또한 '나'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사랑이란 감정을 '나에게 기쁨을 주는 타자와 지속적으로 연대하려는 감정'이라 정의한 바 있다. 내 앞에 현전하는 '너'에게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 내어 성실히 다가갈 때 비로소 순간은 과거가 되며, '그것'에 발 붙인 과거의 '나'조차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마 스쳐지나가는 현재에서, '너'에게로 가던 길이 곧 다시금 '나'에게로 가던 길이 되어 있음을 조망할 수 있음은 타자, 즉 '너'가 가져다 주는 삶의 축복은 아닐까. 만나서, 사랑하고, 울고, 행복하고, 미워하는 것에 삶의 기쁨이 있다. 참된 삶은 만남이기에.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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