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정도>, 윤석철
"인간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어제 뿌린 씨앗으로 오늘을 살고, 오늘 심은 나무에서 내일의 열매를 거둔다. 생각하는 인간은 내일의 열매를 설계하며 오늘의 나무를 선택해야 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내일 거둘 열매를 목적함수, 오늘 심을 나무를 수단매체라 부른다."
궁금했다. 10년에 한 권씩 책을 펴내는 이가 각 권의 저서에 쏟는 진정성이. 또한, 10년을 쌓아 세상에 내놓는 그의 지적 세계가. 궁금증은 이내 부러움으로 바뀌었고 그의 통찰과 혜안에 감탄하며 앉은 자리에서 책을 끝마쳤다. 인간의 능력이 유한하다는 겸허한 분석부터 수단매체의 필연성, 올바른 목적함수 정립의 가치와 생존부등식, 그리고 우회축적에 이르기까지, 간결하지만 냉철한 시선으로 삶을 아우르려는 그의 과감한듯 세심한 시도가 결코 억지스럽지 않았다. 책은 이같은 저자의 인생 철학을 들여다 볼 기회를 선사하며 독자로 하여금 본인의 삶을 응전하게 하는 도전의 기쁨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모든 이의 삶을 정연하게 공식화 하려한다는 비판이 못내 안타까웠다.
저자는 생존부등식을 갖춘 세상을 소망한다. 생존부등식의 세상은 소비자가 원하는 '가치'와 공급자가 원하는 '이익' 사이에 균형을 모색하며, '너 살고 나 살기'를 추구하는 상생(相生)의 관계를 추구한다. 이쯤에서 잠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자. 살아가며 우리가 결단하는 수많은 선택은 그 이면에 무언가 포기하는 것을 함축한다. 즉 선택하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비용의 계산이 최종 선택물에 포함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두려웠다. 올바른 목적함수가 정립되지 않을 때, 정작 우리가 치뤄선 안 될 비용을 지불하며 소중한 걸 포기하고 있지 않냐며 말이다. 상생의 가치는 여기서 드러난다. '너 살고 나 살기'가 목적함수의 항에 자리 잡을 때 성실한 개인을 좌절시키는 이 세계의 부조리와 비합리성이 사라지진 않을까.
생존부등식의 세계가 도래하기 위한 방편으로 저자는 감수성을 제시한다. 어쩌면 사랑과도 제법 닮은 타인의 필요 아픔 정서를 읽어내는 이 감수성의 본질은 '공감'에 있어 보인다. 영어에선 아다시피 'Sympathy'와 'Empathy'를 구별한다. 전자가 우리말의 '동감'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공감'에 가깝다. 타인의 심정을 이성적 차원에서 납득하는 것이 동감이라면, 공감은 상대방의 아픔을 감성적으로 함께 느끼는 것이다. 한창 '갑질논란'이 한창일 때 더욱 개탄스러웠던 건 '갑'의 횡포가 아닌 '을'의 '갑질'이었다. 하루종일 일터에서 고생한 일당 노동자도 퇴근길 수퍼마켓에 들러서는 '갑'이 되어 계산대 앞 직원 위에 군림하려 드는 모습을 보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느끼는 아픔도 읽어내지 못하는 몰감수성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하물며 사회적 배경이 탄탄한 이들이 그들과 처지가 다른 약자들을 향해 감수성을 갖길 기대하는 건 자칫 민망한 요구는 아닐까.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는 아무 의미 없다"라고. 내 삶에 올바른 목적함수를 쌓아 올리며 그 길 위에 꿋꿋이 걸어간다면, 거세게 나를 흔드는 바람에 하염없이 흔들릴 지언정, 또한 세찬 바람에 비록 한 걸음 한 걸음이 더딜지라도, 도약을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부단히 버텨내며 차츰 차츰 성장하리라. 저자가 말한 우회축적이 이와 다름 아니다. 목적함수와 수단매체, 그 본질에 사랑이 스며들 때 비로소 '너'와 '내'가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으리라 꿈꾼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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