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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한, 너무도 모던한

영화 < 월-E>, 앤드류 스탠튼

by 혜윰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kO7dg40uHa4&t=177s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개봉한 장윤혁 감독의 작품 <접속>을 오늘날 감상하노라면, 이제막 인터넷을 매개로 한 커뮤니케이션이 움트기 시작한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긴다. 작품의 플롯은 무척 단순하다. 실연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겹던 전도연(수현 역) 씨와, 또 마찬가지로 사랑 때문에 아파하던 한석규(동현 역) 씨가 인터넷 접속을 통해 대화를 나누며 위로받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다소 빈약해보일 수도 있는 이 작품에 당시 많은 젊은이들은 깊이 매료되었다. 이유인즉슨, 얼굴도 알지 못하는 이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설렘 내지는 충격 때문이었다. 즉 뉴미디어로서 인터넷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접속>이라는 작품에 한껏 위용을 더한 것이다. 다만 오늘날 <접속>이 다시 개봉한다면 아마 많은 관객수를 기대하기란 힘들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우리 삶속에 이미 너무 깊숙이 자리잡은 나머지 아무런 동경도, 설렘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탓이다. 다시 말해, 20여 년 전 뉴미디어로 화려하게 등장한 인터넷은 우리 삶에 보편성으로 자리잡음과 더불어 올드미디어로 전락하게 된 셈이다.



미디어란 무엇일까. 미디어를 우리말로 옮기면 매체, 혹은 매개로 번역된다. 즉 미디어란 필연적으로 ‘둘’ 이상의 것을 상정할 수 밖에 없다. ‘A’라는 대상은 ‘A’를 매개할 ‘타겟(target)’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매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valid)’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몇 가지 유형에 따라 미디어를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나’와 ‘나’를 매개하는 것이다. 더욱 엄밀하기 말한다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혹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매개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록’이다. 가령 초등학교 시절 써두었던 일기를 꺼내 읽는다고 생각해 보자. 일순간 현재의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나’와 연결되어 버린다. 이처럼 미디어의 일차적인 성질은 기록으로써 메시지를 보존하고, 시공간을 넘어 ‘나’와 ‘나’를 매개한다는 특징이 있다. 두 번째는 ‘나’와 ‘타인’을 매개하는 것이다. 이는 더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영화 <접속>에서 전도연 씨와 한석규 씨의 ‘매개’를 가능케한 것처럼 말이다. 혹은 앞서 살펴본 ‘기록’ 역시 마찬가지로 ‘나’와 ‘타인’을 매개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책’이 그러하다. 리처드 도킨스가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한 ‘밈(meme)’의 개념처럼 책은 저자와 ‘나’를 매개한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나’와 ‘세계’를 매개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뉴스’다. 물론 ‘뉴스’라는 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그것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신문이라던가, 인터넷 등 ‘나’의 외부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내게 전달(혹은 매개)해주는 ‘수단’이 미디어에 속한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가지 미디어 유형은 때로 엄밀히 구분되지 않고 그 경계를 자유롭게 오갈 때가 훨씬 많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결코 그 이상의 기능 범위를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디어는 위 세 유형을 거뜬히 뛰어 넘는다. 다시 말해, 이른바 ‘미디어 혁신’을 통해, 과거 고착화되어 있던 미디어의 기능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나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 생성된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가 바로 ‘상호보완성’이다. 이는 미디어가 그저 기록이나 소통, 전달 등을 통해 사용되는 기술적 수단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 현대의 미디어 사용자는 미디어로부터 때로는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꼬집는 개념이다. 나아가 과거의 미디어 사용자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미디어 사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의 미디어 사용자는 마치 미디어가 신체에 내재화라도 된 것인 마냥 의존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흔히 귀여운 애니매이션으로만 알고 있는 영화 <WALL-E>는 앞서 언급한 미디어의 성질을 유려하게 통찰해낸 작품이다. 따라서 영화 <WALL-E>의 내용을 통해 오늘날 미디어가 가진 성격에 대해 좀 더 살펴보려고 한다.


앤드류 스탠튼 감독의 작품 <WALL-E>는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지구에서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로봇 ‘WALL-E(이하 월리)’의 모습으로 막을 연다. 월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하염없이 치우고 청소하며 처량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한편, 인류는 쓰레기로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한없이 유랑 중이다. 이들은 지구가 다시금 ‘살 만한 곳’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때때로 로봇 ‘EVE(이하 이브)’를 지구로 보내 지구의 상태를 점검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구를 점검하러 방문한 이브와, 때마침 쓰레기를 청소하던 월리가 우연히 마주친다. 이브가 지구의 쓰레기 더미들을 향해 수차례 미사일(?)을 발사하는 폭력성을 보이는 통에 월리는 겁이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리는 이브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월리는 이브에게 파릇하게 꽃피운 식물 한 그루를 선물한다. 하지만 이브는 식물을 받고는 돌연 ‘명령어!’를 외치며 우주로 되돌아 간다. 이는 이브의 시스템 안에 ‘지구에서 생명체를 발견하면 우주로 돌아와서 보고할 것’이라는 명령어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놀란 월리는 이브를 놓치지 않으려고 우주선에 몰래 탑승하여 이브를 쫓아간다. 이윽고 월리가 도착한 우주 세계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최첨단 기계의 도움을 받아 무척이나 편리한 삶을 누리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자동화·기계화되어 작동하고 있었다. 이브는 명령어에 따라 식물을 선장에게 전달하고자 선장실을 찾았다. 이내 임무를 완수한 이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웬걸, 방금 전에 자신이 전달한 식물이 버려지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이는 선장의 비서 기능을 하는 로봇 ‘오토’의 소행이었다. 만약 식물이 선장에게 전해진다면 지구 귀환 프로젝트가 발동하게 되는데, 오토는 이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식물을 버리려는 오토와, 식물을 통해 지구로 귀환하는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달려드는 월리, 이브, 선장 등의 구도로 진행되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작품 속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이 은유하는 바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윌리와 이브는 각각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를 상징한다. 한때는 인류의 희망처럼 여겨졌던 월리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구시대의 전유물로 전락해버린지 오래고, 그저 지구의 쓰레기 더미만 외로이 청소하는 신세에 만족할 따름이다. 여기서 쓰레기 더미가 나타내는 바는 뉴미디어가 날마다 수도없이 양산하는 데이터 더미일 수도 있고, 혹은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해 쓰레기 신세가 되어버린 올드미디어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인류에게 올드미디어는 잊혀진 옛 것, 혹은 현대에 무가치한 것으로 사유됨을 영화는 꼬집고 있다. 반면, 월리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브가 쓰레기 더미들을 마구잡이로 폭격하는 장면은 뉴미디어가 가진 폭력성을 드러낸다. 쓰레기들을 하나 하나 일일이 수집해 압축하는 월리에 비해 이브가 쓰레기들을 폭격하는 장면은 효율성에 있어서는 훨씬 우수할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속도와 성과에만 집중하는 오늘날의 미디어를 풍자하는 것이다. 이윽고 이브를 따라 나선 월리에게 펼쳐진 우주 세계의 광경은 현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다. 특히 기계 문명의 힘을 빌지 않고는 스스로의 힘으로 땅에 발딛고 설 힘(혹은 근육)조차 잃은 비대해진 인간들의 모습은 미디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 인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는 더 이상 인류에게 미디어가 선택적 조건이 아닐 뿐더러, 삶 깊숙이 미디어가 침투해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영화는 선장의 조수 로봇 ‘오토’가 지구 귀환을 방해하는 모습으로 절정에 치닫는다. 이때 관객은 마치 로봇들이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특정한 ‘의식적 지향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듯한 착각마저 갖게 된다. 쉽게 말해서, 로븟들은 그저 우주에서 유랑하며 인간들이 기계들의 일부로 기능하는 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듯한 의식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현대인들은 뉴미디어에 종속된 행동 양상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조소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월리와 이브, 선장, 그리고 다른 시민들은 힘을 합쳐 오토에 저항하고 마침내 지구로 귀환한다. 이 과정에서 월리는 크게 다쳤으나 이브의 도움으로 다시금 ‘작동’한다. 이러한 결말이 나타내는 바는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조화, 그리고 미디어로부터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메시지로 해석 가능하다.


영화를 보며 뉴미디어가 가진 속성에 대해 고찰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20세기 중후반의 세계 전역을 휘어잡은 문화운동 성격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 이는 ‘넘어서’, 혹은 ‘다음’을 뜻하는 ‘Post’와 근대적 문화 양식을 나타내는 ‘Modernism’이 합해져서 근대 이후의 ‘새로운’ 문화 양식을 뜻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새로운’이라는 말뜻에는 다소간의 함정이 있다. ‘새로운 것’은 그 자체로 새롭다는 속성을 스스로 부여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어제 새로운 핸드폰을 샀다고 생각해보자. 이 핸드폰에게 ‘새로움’이라는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면 1년이 지난도, 10년이 지나도 그것은 ‘새로운 것’이라 불리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고작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핸드폰의 최신성은 흩어져 증발하기 일쑤다. 이처럼 ‘새로움’이라는 속성은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성 속에서만 ‘새로움’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에서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해져야만 모던해질 수 있다”고 말한 속내도 바로 여기 있다. 익숙함을 용납할 수 없다는 압박 내지는 강박만이 새로움에 대한 새로움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90년대 젊은이들이 영화 <접속>을 통해 받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이 인터넷에 대해 느꼈던 신선한 충격이 너무나도 낡고 바랜 나머지 도무지 모던함이라고는 발견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처럼 한 시대의 뉴미디어는 언젠가 시간의 뒤앙간으로 밀려 올드미디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품고 있다. 오늘날 그 어떤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뉴미디어라 할지라도 그 숙명은 피해갈 길이 없다. 그렇다면 미디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새로움에 대한 강박성 속에서 끊임없이 뉴미디어의 뉴미디어를 개발하는 것, 그로 인해 인간이 누릴 것으로 기대되는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일까. 가령 영화 속 선장의 일거수일주족을 돕는 ‘오토’와 같은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첨단시대에 걸맞는 목표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선장이 편의 대신 잃은 것을 떠올려 보자. 그는 오토 없이는 자신의 몸을 지탱할 신체적 능력도 잃었고, 나아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유할 정신적 능력도 상실했다. 이처럼 미디어가 나의 신체와 나의 정신을 대신하여 살아간다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존재성을 미디어에게 내어주는 것은 아닐까. 이는 거칠게 말해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자, 삶의 점진적 소멸에 비견한다. 월리와 이브의 양립처럼,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조화로 나아가며 다시금 생애의 의지를 불태우고자 스스로 발딛고 사유할 능력을 훈련하는 것, 그것만이 모던함 속에서 모던함을 잃지 않을 유일한 길은 아닐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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