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공감>, 김형경
대학 진학을 앞둔 스무살 시절, 난 멋진 심리학자가 되길 꿈꿨다. 그때만 하더라도 심리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터라 여러 매체를 통해 내 안에 다분히 환상적(?)으로 형성된 심리학자에 대한 이미지는 뿌리치기엔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특히나 심리학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은 당시 한창 인기리에 연재되던 네이버 웹툰 <닥터 프로스트>의 영향이 컸다. 웹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프로스트 교수는 대상의 언저리에 놓인 직간접적 요소들을 단서로 대상이 살아온 삶, 행동패턴, 정신적 사고 경향 등을 단번에 분석해내고는 과격하고도 정밀하게 진단하고, 치유한다. 예리하고 날선 분석력, 또 결과적으로 정확하기까지 한 프로스트의 모습은 마음의 혹을 달고 안절부절하는 환자에게 메스 하나 없이 마음을 째고 꿰매는 것이 마치 작은 신처럼 다가왔다. 이윽고 어린 나는 신이 되길 꿈꾸게 됐다.
이 책은 표지에 적혀 있듯 심리 치유 에세이다. 김형경 작가가 한겨레 상담 코너에서 접한 여러 사연들과 그에 따라 피드백했던 내용을 네 개의 범주로 나누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사연들은 모두 어디서 한 번 쯤 들어봤을 법한 익숙하고도 평범한 내용들이다. 다만 그에 따른 김형경 작가의 피드백은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심리학 이론적 배경에 기반하고 있다. 심리학 전문가들도 김형경 작가가 갖춘 심리학 지식 수준에 감탄했다고 하니 나같은 일반인의 감탄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각 사례마다 김형경 작가의 코멘트가 끝나면 여러 철학자의 격언이 달린다. 철학자들이 남긴 말을 읽으며 예전에 읽은 강신주 작가의 <다상담>이 떠올랐다. 이 책 <천 개의 공감>이 심리학적 관점에서 각 사례를 분석했다면, <다상담>에서 강신주 작가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여러 사연을 분석하고 그들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이와, 철학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했던 이가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왤까. 진리는 하나로 통하기 때문일까.
눈에 보이는 '현상'은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찰'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상 너머의 '본질'은 눈만 있다고 볼 수는 없는 영역이다. 눈이 아닌 '생각'이 필요하며, '관찰'이 아닌 '통찰'이 요구된다. 통찰을 뜻하는 영어 단어 'insight'를 살펴보면 이해가 더 빠를지 모르겠다. 'insight'는 '안'을 뜻하는 'in'과 시력을 뜻하는 'sight'로 구성된 단어다. 즉 현상 '안'의 본질을 보고자 함을 의미하는 것이 통찰이 함의하는 바다.
현상이니 본질이니, 관찰이니 통찰이니 하는 논의가 왜 필요한지 의아한 이도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자.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청년들의 실업률이 무척이나 높다. 이것은 현상이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뉴스를 보고 들으며 알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난 내용이다. 그런데 높은 실업률의 이면에는 특정한 본질이 숨어 있다. 어떤 이들은 청년들의 중소기업 기피를 주장할 지도 모르며, 또 다른 이들은 기업의 고용 감소를 주장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실업률의 진짜 본질을 밝혀내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본질을 주장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대응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상의 핵심 본질이 아닌 사항을 들고 일어서며 사람들을 오도한다면 현상을 더욱 악화만 시킬 따름이지 않겠는가.
(혹 본질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원인 중에서도 아주 근본적인 원인인 근원 말이다.)
어렸을 적 내가 <닥터 프로스트>의 주인공 프로스트 교수에게 반했던 건 그의 예리한 통찰력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프로스트는 일반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 버릴 법한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환자 내면의 깊은 상처를 '통찰'해 냈다. 가히 마주치면 혹 내 생각을 들키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로 말이다. 심리학자들은 프로스트 교수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마음을 진찰하고 진단하는 과정에서 심리학자 본인이 대학 과정에서 배운 여러 학자들의 이론적 배경, 또 실제 심리 치료 실무 과정에서 체득한 경험적 내용 등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는다.
즉 심리학자는 심리학적 관점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진단하고 치유한다. 이것이 어린 나에게는 그저 천부적인 통찰로 느껴졌지만, 사실은 학습과 훈련을 거쳐 보다 진화한 관찰력을 얻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프로스트 교수의 통찰은 학습된 통찰이다. 학습된 통찰이란 학습하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현상을 바라보는 이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프로스트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듯, 어떤 이들은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다시 거칠게 말하면 세계관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눈 앞의 세계를 바라보며 각기 다른 자기만의 이해를 가진다. 살아가며 의도적으로 학습하고, 경험적으로 체화되고, 환경적으로 쌓이고 쌓인 가치관들은 우리의 또 다른 '눈'이 되어 현상을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 대상을 바라볼 때 눈으로만 '감각'하는 것을 넘어서 이성적, 정서적으로 느끼고, 인식하고, 판단한다. 물론 이것은 아직 어디까지나 관찰의 단계에 머문 것이지, 통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모든 사람이 대상을 동일하게 관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통찰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통찰이 다양하다면 왜 김형경 작가와 강신주 작가는 동일한 사연에 비슷한 해결책을 내놓았을까. 관찰의 한계가 빚어낸 통찰의 다양성을 심리학과 철학이라는 안경이 어떻게 좁혀준걸까. 비단 다른 안경을 썼으면 다른 세계가 펼쳐져야 마땅한 일인데 말이다.
인간이 심리학, 철학이라는 다양한 관찰 도구를 가지고 현상을 바라볼 때 가슴 깊이 소망하는 바는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심리학적 통찰, 인문학적 통찰, 종교적 통찰 등은 그들 나름대로 모두 본질을 찾는데 관심을 둔다. 자기 안에 착한 모습과 포악한 모습이 공존한다는 깨달음에 괴로워하는 내담자의 모습을 보며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기반해서 '양가감정'이라 진단하고, 도교에서는 태극 문양에서 두 원이 통합된 모습에 비교했으며, 동양 철학에서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라'고 말했다. 사용한 단어나 표현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의미하는 바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관찰은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쉬이 왜곡하지만 심리학, 철학, 종교 등의 관찰 도구를 통해 우리는 '맨 눈'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강신주 작가도, 김형경 작가도 환자가 지닌 상처 내면의 깊은 본질을 들여다보고자 비록 각기 다른 관찰 도구로서 철학과 심리학을 사용했지만 끝내 비슷한 세계를 보았던 것은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 본질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온 끝없는 탐구의 역사가 마음 치유의 역사와 맞닿는 지점이 참 흥미롭다. 플라톤 이래 이데아를 찾아 헤맨 인간의 여정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책의 내용은 달리 요약할 길이 없어 생략했다. 각기 다른 사례에 각기 다른 심리학 이론이 적용되어 있다 보니 몇 가지 인상적인 사례를 꼽으라면 꼽겠지만 책 전체를 요약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나와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이 다소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