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아워>, 이국종
<세.바.시>의 애청자는 아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않고 아주대 중증외상센터 외과 의사 이국종 편을 꼽곤 한다. 나의 인상을 휘감았던 그의 한 줄은 실로 거창할 것도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태 고발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내 식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 의료계에는 거대 담론만 무성해요. 의료비 복지니, 노인 의료 혜택이니 말이죠. 당장 수술대 앞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 의사, 간호사들의 지친 눈과 손을 어떻게 위로할지는 아무 관심도 없고요. 또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가차없이 묵살되죠. 정책 입안자들의 치적이 되지 못할만한 사항들은 안건조차 될 수 없어요. 초를 다퉈 생사를 오가는 중증 외상 환자들의 경우 신속한 수술을 위해 헬기 이동이 필수적이에요.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진국은 정부 차원에서 헬기 이동을 체계적으로 정착시켜왔구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떤지 아세요? 헬기 띄워서 제가 시달린 민원이 어떤지 아세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헬기 띄우지 말래요. 병원에서 공부하는 간호사들이 자기 학습권 침해 받는다고 자기 병원에 민원 넣는 형국이에요. 급하게 헬기 착륙할 곳을 찾는데 잔디 상한다고 다른 구역 알아보래요. 그 사이에 죽어가는 환자는 아무도 관심없어요. 그저 거대 담론만 멋들어지게 내놓을 뿐이에요. "
강연을 들으며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계 현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게 뭐 있어서 끄덕였겠냐마는 거대 담론만 무성한 것이 어디 의료계 뿐이겠는가. 뜬구름 잡는 이상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열을 올리며 현실은 보지 않는 것은 지긋지긋한 우리네 일상이니 의료계라 한들 공감이 어려울리 없었다. 내게 이국종 씨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지긋지긋함이 당연시 되어버린 현실을 깨부수려는 괴짜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차마 나는 걷지 못할 정의롭고도 험난한 길을 그가 대신 걸어주며 끝내 완주하길 응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비겁한 방관자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이제 독자가 되어 그의 지난한 행보를 쫓아보았다.
이국종 씨의 전언에 따르면 중증외상센터에 실려오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저임금 노동자가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해당 직업군의 특성 때문이다. 공장 생산 라인에서 기계의 오작동으로 인해 손이 잘려나간다거나, 높은 건물에서 골재 작업을 마무리하다 낙하하는 등 현장에서 일할 수록 외상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업무 위험성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는 것도 아니어서 수술을 하고도 수술비를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라 한다. 이는 매출 총액 대비 1~2%로 먹고 사는 사립 대학 병원의 경우 달가울 리 만무한 상황이고, 이것은 이국종 씨가 병원 내에서 겪은 크고 작은 고달픔 중 한 가지 원인으로 자리잡는다.
이국종 씨는 한국의 중증외상센터에 미비한 시스템을 체계화하고자 보다 선진국형 중증 의료계 시스템을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보고 배운 곳은 UC 샌디에이고, 그리고 영국이었다. 그곳에서 짧고도 긴 연수 시절을 보내며 중증 외상 환자들의 신속한 이송이 환자의 생존률과 얼마나 긴요한지 깨달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그는 선진국형 중증 외상 환자 치료 시스템을 정착시키고자 부단히 애쓴다. 아마도 그는 그것이 이토록 끝없고 답없는 여정일 줄은 몰랐으리라.
생각해보면 참 단순한 일이다. 이국종 씨의 요구사항이 그토록 비현실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닥터 헬기의 보급과 파일럿 교육을 통해 환자 이송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하고, 제반 이착륙장 및 추가 간호사 인력 증원 등이 그가 바라는 전부다. 물론 돈으로 얽히는 이해관계가 투입되며 이 단순함은 깡그리 무너진다. 예산은 한정적이고, 예산을 어떻게 집행할지는 집행부의 관할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는 현장에서 일하는 모두의 바람과 꼭 일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국종 씨가 절박한 만큼, 한국 사회에는 또 다른 절박한 문제가 많다. 이를 모르지 않는 이국종 씨도 정책 입안자들의 사정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석해균 선장, 귀순 병사 사건 등 대중의 주목을 끌만한 자극적(?)인 사건 뒤에만 모래 바람처럼 일고 사그라지는 정치인들의 관심에 몹시 지친 모양새다.
책을 읽으며 줄곧 한 편의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결 못할 갈등을 마주한 한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부단히도 싸우는 여정이 흡사 현실적 영웅의 모험과 닮은 탓이다.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길을 지지해줄 사람 없는 상황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진배없나 보다.
결국 나 또한 이국종 씨를 둘러싼 주변인 마냥 도움의 손길 하나 보탤 수 없는 방관자란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으나 책의 제목을 보고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골든아워가 울리는 곳은 병실 뿐이 아니다. 이국종 씨는 여태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나는 내가 속한 곳의 골든아워가 울리는 굉음에 귀기울이자.
P.S : 머릿말에 보면 이국종 씨가 <칼의 노래>의 저자 김훈 씨의 문장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눈치다. 이국종 씨는 김훈 씨의 문장을 닮고 싶어 많이 노력했다는 아주 겸손한 이야기를 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지나친 겸손함이 아니었나 생각이 일었다. <골든아워>가 소설처럼 느껴진 데는 비단 그 구성과 극적 전개 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일부러 꾸미지 않은 수사적 표현임에도 때로 그의 절절한 감정, 혹은 억울함, 답답함, 짧은 기쁨의 순간을 오롯이 담아낸 아름다운 문장들이 책 곳곳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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