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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숨결은 안녕하신가

<숨결이 바람될 때>, 폴 칼라니티

by 혜윰


'죽음을 기다리며' 쓴 젊은 의사의 에세이. 아니, 그가 보여준 삶의 태도라면, 다만 '살아가며' 쓴 에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촉망 받는 의사로 주위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그는 돌연 죽음의 문턱에 생각보다 빨리 다다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듣는다. 어쩌면 그가 들은 진단은 꼭 충격적일 것도 없다.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의미에서라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저자 폴 칼라티니가 여생을 보낸 모습은 나와 퍽 이질적이지가 않다. 언젠가 죽을 내가 살아가는 오늘과, 닥쳐오는 죽음 앞에선 저자가 살아가는 하루가 닮았다. 그는 정말 두렵지 않았을까?







죽음은 인간이 지닌 실존적 한계다. 인간은 죽는다. 죽을 것을 알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간다는 것이며, 잘 살아가는 것은 잘 죽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두고 늘어놓는 이 유치한 수사가 어쩌면 지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본 그 어떤 사람도 진정 자신이 언젠가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담아본 적이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임을 인정하는지 말이다. 내 눈에 사람들은 그저 하루 하루가 바쁠 뿐이다. 죽음을 남의 것으로만 치부하며 오늘의 식사 메뉴나 고민하는 사람들 통에서 죽음의 의미를 되살려보고자 하는 일은 지루하고 따분한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폴 칼라니티는 촉망 받는 의사였다. 의학계의 기대주였다. 힘겹게 공부하며 보낸 그의 젊은 시절을 기꺼이 보상해줄 미래는 두 팔 벌려 그를 맞이할 태세였다. 그러나 돌연 그에게 들이닥친 죽음은 그의 과거를 조소한다. 열심히 살아온 과거를 빨아들이는 시커먼 죽음의 블랙홀 뿐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된 그가 도리어 죽음에 역공을 당한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의 노력에 관심이 없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죽음은 그냥 온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음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다르다. 물론 난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로 보낸 적이 없다. 절대적이고도 비가역적인 이별, 아주 극단적인 이별을 경험한 적이 없다. 고로 죽음에 대한 나의 어떠한 사색도 통렬히 눈물 흘린 자의 스치는 생각보다 가벼우리라. 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은 절망해봤을 것이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몸부림을, 어떻게 손 써봐도 되돌릴 수 없는 잔인함을, 그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한껏 겸손해진다. 우주의 무한함 속에 티끌 같이 존재하는 인간의 유한함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과 상관 없이 운행하는 천체의 질서를 경험한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단편을 보면 매우 음울한 도시를 배경으로 산듯 죽은듯 살아가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조소가 묻어난다. 이 단편 중 백미는 누가 뭐라해도 <The Dead>가 아닐까. 제목부터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이내 '물리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 중 누가 죽은 자들인가 어리둥절해진다. 나의 육체는 다만 물질일 뿐이다. 이 세상과 나라는 '정신'을 연결해주는 통로일 뿐이다. 통로가 단절된다면 정신도 발현되기 어려울 것이나, 애초에 통로를 건널 정신이 부재한 자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폴 칼라니티는 하루하루를 의미로 가득 채운다. 목적으로 가득 채운다. 고장나고 망가져가는 통로에도 괘념치않고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려던 그의 정신은 충만함으로 흘러 넘쳤다. 결국 그의 통로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의미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그의 숨결을 흘려 보낸 통로는 재가 되어 흩어졌지만, 그의 숨결은 바람되어 세상을 가득 메운다. 당신의 숨결은 안녕하신가.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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