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우화>, 류시화
서점을 가면 베스트 셀러 진열대에 자리한 책을 둘러보는 습관이 있다. 읽을만한 책을 찾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얼마나 한심한(?) 책들이 많이 팔릴까 개탄하기 위함이란 점에서 다소 건방진 습관이라 부를만 한다. 그 와중에 나 또한 한심(?)하게도 작가의 명성과, 귀여운 표지 디자인에 마음이 끌려 책을 집어 들었으니, 이 또한 우화일지도 모르겠다.
작가 류시화는 책을 마무리하며 본인의 집필 의도를 명확히 밝힌다. 그는 현실 세계의 어리석은 인간사를 드러내고자 가상의 세계 헤움을 그린다. 만약 헤움 마을의 바보 같은 이야기를 보고 그것이 그저 재밌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현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자신이 헤움 마을의 바보인 걸 깨닫지 못하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헤움 마을에 들어갈 자격은 충분할지도.
다음은 류시화의 전언이다.
나는 때때로 이런 우화를 쓰고 싶었다.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의 엉뚱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우화는 이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세계를 불러온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독자를 상상의 이야기 속으로 안내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에 곧바로 가닿기란 어려운 일이다.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대립과 다툼을 낳는다. 엉뚱한 주인공들로 하여금 우리 대신 말하고, 행동하고, 문제를 해결하게 해야 한다. 그 상상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리는 웃고 즐기지만, 책을 덮고 나면 뭔가 당혹스럽다. 그들을 통해 어김없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쉽게 읽히는 만큼 마음에 남는 파문은 더 크다.
<인생 우화> 中 에필로그 - 류시화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맨 처음 등장하는 <제발 나라는 증거를 말해주세요>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빵장수 헤르셸이다. 헤르셸은 자못 철학적(이 책에서 철학적이라는 말은 우화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다분하다)인 인물이어서 때때로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문하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대답도 헤르셸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욕탕에서 친구들과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하던 중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옷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지요. 제빵사 옷을 입고 있는 빵장수 헤르셸이 헤르셸이듯이 말이에요." 이를 들은 헤르셸은 생각했다. '옷을 다 벗고 있는 지금 나는 누구지?' 헤르셸은 결심했다. 아무리 발가벗고 있어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빨간 리본을 다리에 묶기로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얼마 뒤 헤움 마을로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남자가 헤르셸의 리본을 보고 그것이 헤움의 풍습이라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다리에도 빨간 리본을 묶은 것이다. 이를 마주한 헤르셸은 경악한다. '저 사람이 헤르셸이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지?' 헤르셸은 남자에게 다가가서 묻는다. "당신은 헤르셸이에요. 그렇다면 저는 누구죠? 제발 내가 누군지 알려주세요!!"
앞선 에필로그에서 확인했듯 작가 류시화는 현실 세계를 이야기하고자 헤움 마을을 이야기했다. 달리 말하면 독자들이 현실 세계에서 살아 숨쉬는 헤르셸을 보고 느끼길 희망한 것이다. 작중에서 헤르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겨우 빨간 리본 하나에 담는다. 또한 그 작디 작은 리본 하나로 존재적 안정성을 확인하곤 안심하는 인물이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낯설고 추상적인 비현실적 은유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어떤 이는 권력에, 또 다른 이들은 돈에, 명예에 사력을 다해 자신의 정체성을 담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조금이라도 '빨간 리본'이 풀릴 위기에 처하면 성을 내는 그들의 모습도 덤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재벌 2세의 대사 '내가 누구 아들인 줄 알아?'가 그 예다. 자신의 존재성을 존재 외적 요소로 쉽게 규정하려하는 사람이라면, 언제고 탈락 가능한 그 요소의 한계로 인해 평생 정체성 박탈의 두려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의 빨간 리본은 무엇일까. 맨 몸의 헤르셸이 되어도 본인의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을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한 여정이 곧 우리네 삶의 목적과 다름 아닌지 모르겠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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