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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r 02. 2020

괴테, 『파우스트』
"구원의 동반자, 메피스토펠레스"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5IsL35ql3pc&t=429s




세상에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 존재할까요. 아마 그렇진 않을 것 같습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의 마음 속에나 악한 본성이 조금씩은 숨어 있기 마련이죠.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여러분 마음 속에 도사리는 악한 본성을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나아가 그러한 악한 마음 때문에 자기 환멸에 이르렀던 적은 없나요. 이를테면 '나는 왜 이렇게 증오가 많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사랑이 없을까', '나는 왜 저 사람을 이유 없이 저주 할 만큼 이렇게도 아량이 좁을까', '나는 정말 악마 같구나' 하고 말이죠. 이처럼 여러분 안에 내재한 악한 마음 때문에 자기 자신을 채근하고 원망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짧은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악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안겨줄 오늘의 책, 괴테의 파우스트입니다.



오늘날 독일 문학의 거인으로 남은 괴테는 지금으로부터 약 270년 전인 1749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괴테의 재능은 남달랐습니다. 여덟살에 시를 쓰는가하면, 열 세 살에 시집을 내는 등 이미 어렸을 적 부터 타고난 문학적 자질을 유감없이 뽐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대 초반을 지날 즈음에는 잠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기도 했지만, 괴테는 자신의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문학인으로서 괴테의 삶은 탄탄대로였습니다. 1774년, 그의 나이 겨우 25세 때 출간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며, 이후로도 그는 <이탈리아 기행>,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피게니에>, <파우스트> 등 걸출한 작품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83세에 눈을 감기까지 활발한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중 오늘 살펴볼 작품 파우스트는 구상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려 60여 년이나 걸린 노작(勞作)입니다. 아울러 오늘날 독일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있죠. 일설에 따르면 괴테가 <파우스트>를 구상할 때 크게 영감을 얻은 것은 당시 민중 소설로 퍼져있던 ‘파우스트 전설’이라고 하는데요. 이 전설에 등장하는 마법사 파우스트가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마법에 의지하는 모습에서 괴테는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괴테는 삶의 목적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간상을 그려보기로 계획했고,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파우스트라는 커다란 열매를 맺게한 것입니다.



이러한 파우스트의 구성은 크게 1막과 2막으로 나뉩니다. 이 중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파우스트 이야기는 1막의 이야기인데요. 왜냐하면 비교적 평이한 줄거리로 흘러가는 1막과 달리 2막은 그 세계관도 훨씬 방대할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요소들도 워낙 많은 탓에 줄거리를 파악하기 조차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진정한 주제의식을 깨닫기 위해선 반드시 1막과 2막을 모두 읽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1막과 2막의 가장 굵직한 사건들을 먼저 거시적으로 살펴본 후에, 후반부에 가서 다시 각 사건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식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줄거리를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 후반부부터 시청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파우스트의 중심 인물은 인간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입니다. 지상에 속한 파우스트는 고령의 박사로서 오직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바쳐 수많은 지식을 섭렵했죠. 하지만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도 파우스트의 마음에 남는 건 허무함 뿐이었습니다. 그 어떤 지식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우스트를 멀리서 훔쳐보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느님(The LORD)에게 내기를 겁니다. 내기의 내용인 즉슨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타락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비록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일시적으로는 흔들릴지 몰라도 결국엔 옳은 길로 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순순히 내기에 응합니다.


내기가 성사되자 승리를 확신하는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자연스레 접근을 시도합니다. 특이한 점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처음부터 악마의 형상으로 파우스트 앞에 나타나지 않고 처음엔 땅의 정령이라는 신비로운 모습으로, 그 다음엔 강아지, 그 다음엔 실험실의 삼각 플라스크 등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파우스트에게 다가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한 가지 계약을 제안합니다.



계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이승의 쾌락을 선사한다. 둘째, 만약 파우스트가 어느 한순간의 쾌락에 머무르고 싶다면 '멈추어라 순간아, 너 정말 아름답구나'를 외치고, 그 즉시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소유가 된다. 다시말해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이승의 쾌락에 만족할 거라 여겼던 반면, 파우스트는 자신이 결코 이승의 쾌락에 만족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계약이 성사된 이후 메피스토펠레스의 첫 번째 계획은 다름아닌 젊음이었습니다. 이른바 마녀의 영약을 통해 파우스트를 아주 젊은 청년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는 길을 지나다 그레트헨이라는 여인을 마주치곤 금방 마음을 빼앗기는데요. 사랑에 빠진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에게 건네는 다음의 메시지가 참 인상적입니다.



이 대사가 인상적인 이유는 세상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한평생 모든 지식을 파헤쳤던 파우스트가 이제는 지식보다 사랑을 쫓고 있음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파우스트의 사랑은 행복한 결말을 맺지는 못합니다. 파우스트는 모종의 사건으로 그레트헨의 친오빠를 살해하게 되며, 또한 그레트헨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사악한 농간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와 아기를 죽이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슬픔에 찬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감옥에 들어가 그레트헨을 구해내려 했지만,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죗값을 치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하늘에서는 별안간 큰 소리가 났고, 이를 들은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만만하게 외쳤습니다. 저 여자는 심판 받았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큰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그녀는 구원 받았다. 이로써 그레트헨의 구원을 끝으로 1막은 막을 내립니다.








이어지는 2막은 그레트헨을 잃고 실의에 빠진 파우스트가 알프스 초원에서 넋을 잃고 있는모습으로 막을 엽니다. 자연을 통해 점차 회복되어 정신을 차린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따라 한 궁전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선 마침 신하들이 국가의 재정 위기를 황제에게 보고하던 중이었는데요. 이때 파우스트는 한 가지 묘책을 내어 국가의 돈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주고 그 덕으로 황제에게 큰 신임을 얻게 됩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황제가 파우스트의 능력을 어찌나 과신했던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녀 헬레나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부탁이었지만 다행히도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술수를 통해 고대 그리스로 건너가는데 성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프롬프터 같은 기술을 통해 황제에게 헬레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도 성공하죠. 이로써 파우스트는 황제에게 더없이 큰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파우스트에게는 더 큰 욕심이 생겼습니다. 막상 고대 그리스의 절세 미녀 헬레나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되자 한눈에 반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파우스트는 이윽고 헬레나와 결합하여 오이포리온이라는 아들까지 낳게 되는데요. 슬프게도 오이포리온은 혈기에 못 이기고 이리저리 뛰놀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헬레나 또한 아들을 잃은 충격 탓에 하늘로 사라지고 말죠.


이로써 다시금 실의에 빠진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여유있게 다가오며 위로를 건넵니다. 세상엔 수많은 쾌락이 존재하니 실망하지 말라는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언급한 쾌락들을 무시하며 엉뚱한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일종의 간척사업이었습니다. 일전에 파우스트는 그간의 업적에 대한 상으로 황제로부터 해안지대를 하사받은 바 있는데요. 지금 파우스트는 바로 그 해안지대를 비옥한 땅으로 가꿀 수 있도록 추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부탁이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니 파우스트의 명대로 따라주었습니다. 그렇게 공사가 한창 진행되어가던 어느날 파우스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덧붙여 소리쳤습니다.



곧 파우스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파우스트의 시신을 가져가며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이로써 파우스트의 내용을 굵직한 줄거리 위주로 간단하게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다시 작품의 처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 이전에 파우스트는 이미 지식의 덧없음을 느낀 상태였죠. 즉 그는 세상의 진리를 쫓아 모든 지식을 섭렵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다 라고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다시말해 파우스트는 지식들을 쌓아 나갈수록 학문의 허무함만 깨달았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괴테는 인간 이성의 한계, 혹은 계몽주의의 한계를 꼬집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중세의 종말을 알리며 도래한 계몽주의는 신화나 종교 따위의 비합리적인 것들을 배격하고 그 자리에 합리적인 인간 이성을 채워 넣으려 시도했는데요. 괴테가 보기엔 인간의 이성도 역시나 비합리적인 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에 결코 지식만으로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제가 언급한 구원의 의미를 굳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인간의 실존적 상태가 완성되는 단계 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시면 충분합니다.







아무튼 지식만으론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회의에 빠져 있던 파우스트 앞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합니다. 이후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요. 이때 파우스트의 사랑은 낭만적이거나 혹은 성숙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책임감 없는 청춘의 정욕적인 사랑에 가깝습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봤죠. 그에비해 그레트헨의 영혼은 너무나도 순수하고 맑아서 혹여나 파우스트의 마음까지 정화되진 않을까 염려했던 메피스토펠레스는 잔꾀를 부려 두 사람을 비극으로 이끕니다.



물론 최후의 순간에 파우스트는 꼼수를 부려 그레트헨을 감옥에서 빼내려 하기도 했지만 그레트헨은 담담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욕적인 사랑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 그리도 또 하나는 자신의 죄를 직면하는 태도입니다. 파우스트는 지식에 이어 사랑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과, 또한 그레트헨의 구원을 목도하며 자신의 삶에서 발생한 일을 결코 피하지 않는 책임감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파우스트는 한 궁전으로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습니다. 황제의 신임이 어찌나 두터웠던지 고대 그리스의 미녀 헬레나의 모습을 보여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까지 받습니다. 이윽고 파우스트는 이를 실행에 옮기다 헬레나와 사랑에 빠지곤 헬레나와 결합하여 오이포리온을 낳기도 하죠.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아 오이포리온의 죽음으로 다시금 파우스트는 커다란 좌절에 빠집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 셋이 상징하는 바를 게르만 신비주의와 헬레니즘, 그리고 순수예술이라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뜻하는 바를 자세하게 학습하실 필요는 전혀 없고요. 다만 괴테가 당대에 퍼져있던 많은 문화들 중 어떤 하나의 우월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보다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싶었구나 정도로만 알고 지나가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위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명예로도 역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이고요, 또 하나는 예술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파우스트는 황제의 신임을 얻고 나름대로 부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았죠. 또한 순수예술을 상징하는 오이포리온과의 행복한 시간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름에 빠진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최후의 부탁을 합니다. 바로 간척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마을을 건설하는 것이었는데요. 혹자들은 이를 말년의 괴테가 보여준 사회주의적 성향이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애로 해석하는 편이 파우스트의 주제의식을 이해하기에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을을 짓고 난 후 파우스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죠.



여기서 특히나 저의 눈길을 끌었던 건 다름아닌 자유와 위험입니다. 평생토록 구원에 이르기 위해 끝없이 달려온 파우스트는 결코 지식으로도 정욕으로도 명예로도 예술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았죠. 다만 그가 깨달은 것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어떤 특정한 고정체가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와 의지,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파우스트의 가장 유명한 대사가 빛을 발합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또 끝없는 미로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파우스트에게 이러한 방황의 원인었던 메피스토펠레스의 존재야말로 참 흥미로운 요소가 이널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이를 비판하는 논리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은 선과 악이라는 두 선택지 중 악의 끊임없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선을 택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의미 있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죠 쉽게말해서 ‘절대적으로 선한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악의 유혹이 없을 것이고, 오직 선 밖에는 행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기계적인 선을 베풀 뿐이라면 그것을 과연 도덕적이라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견지하고 다시금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립 관계를 들여다보면 충동과 방황이 파우스트에게 왜 필요한지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어두운 충동질을 통해 외려 파우스트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 노력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다음의 대사는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가 스스로를 소개하는 말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스스로를 소개한 바대로 항상 방황을 원하면서도 항상 노력을 만들어내는 힘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자명하게도 흰색과 검은색은 틀림없이 서로 다른 색이죠. 하지만 흰색은 검은색으로 인해 더욱 희게 되며, 또한 검은색은 흰색 덕분에 더욱 검게 되는 법입니다. 이를 서로 다른 대립적 관계로만 보기보다는 서로의 존재성을 완성해주는 한 쌍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안에 내재한 악을 보는 관점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네 삶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악의 절대적 진공 상태에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악의 충동질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올바른 길로 가고자 하는 노력에서 그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여러분 안에 꿈틀대는 악한 본성을 너무 원망하지는 않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포기하지 않는 한 여러분 안의 악은 아직 악이 아니며, 방황하고 있다면 또한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한 번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videos?view_as=subscri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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