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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r 04. 2020

아리스토텔레스,<명제론>  
"디오도로스적 삶의 해방"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Vy-Ylwe6LwA&t=311s




이번 포스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시리즈 두번째 포스팅입니다. 혹시 오르가논이 무슨 책인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오르가논 시리즈의 첫번째였던 범주론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각 낱말들의 성질을 열심히 구분했었죠. 그 이유는 각 낱말들을 그것이 본래 속한 범주에 맞게 사용하지 않을 경우, 좋지 않은 궤변들이 사회에 들끓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을 통해 각 낱말들에 대한 분석을 마친 다음, 그 다음에 주목한 대상은 무엇이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낱말에 대한 분석을 마쳤으므로 이제는 낱말과 낱말이 더해진 문장을 분석하고 싶었겠죠. 여기서 뜻하는 문장이란 하나 이상의 단어가 문법적으로 아무 이상 없이 연결된 최소의 의미 단위를 가리키는데요. 가령 다음의 것들이 모두 문장에 속합니다.



이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건 a, c, d 세 문장입니다. 이들은 다른 문장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바로 참이나 거짓으로 판별 가능하다는 거죠. 보다시피 다른 문장들은 딱히 참이나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반면 a, c, d 세 문장은 명확하게 판별이 가능하죠.


이처럼 참 거짓이 명확하게 판별 가능한 문장을 논리학에서는 명제라고 하는데요. 명제가 아닌 문장들은 일상 대화에 속하므로 굳이 학문적인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겁니다. 가령, 나는 빨강색이 좋아 라는 상대방의 말에 대해 논리적인 분석을 한다면 사회 생활하기 어렵겠죠. 아무튼 이러한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장들 중에서도 명제들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오늘의 책 명제론인 것입니다.



명제론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각 소제목들의 이름은 김진성 선생님의 번역을 참고했습니다.)


목차를 간단히 살펴보면 1장부터 6장까지는 명제의 기본적인 개념을 서술하고 있고요, 이후 7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은 명제 간에 성립 가능한 관계와 나아가 명제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모든 내용들을 다 소개해드리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내용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기 때문인데요. 바로 제 블로그의 논리학개론 게시판에서 총 여덟편으로 정리한 정언논리 시리즈가 명제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명제론에 담긴 이론적인 내용들이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정언논리 시리즈를 참고하시길 바라고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책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9장의 내용만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9장의 내용은 한 논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박을 담고 있습니다. 그 논쟁은 다름아닌 메가라 학파의 디오도로스 크로노스가 제기한 건데요. 메가라 학파는 소크라테스 학파 중 하나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선함(good) 뿐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었던 디오도로스는 이러한 주장을 펼칩니다.



먼저 현재 시점으로부터 미래에 해당하는 어느 특정한 시점을 F라고 가정하겠습니다. 또한 F라는 시기에 발생하는 특정한 사건을 X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고나서 과거 시점 P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겁니다. 미래 F에 사건 X가 발생한다. 이렇게 발화된 명제를 S라고 하겠습니다.


디오도로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첫째,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명제란 참과 거짓이 분명하게 판별 가능합니다. 따라서 둘째, 명제 S는 참 혹은 거짓 둘 중 하나입니다. 또한 셋째, 명제의 참/거짓 여부는 상황에 따라 제멋대로 바뀔 수가 없으므로, 만약 명제 S가 과거에 참이었다면 미래에도 참이며, 과거에 거짓이었다면 앞으로도 거짓일 겁니다. 그러므로 넷째, 미래 F 시점에 사건 X가 실제로 발생했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 P시점에 S명제가 참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즉 미래 시점에 발생한 모든 사건들은 P시점에 발화된 S명제의 참 거짓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죠.


혹시 이해가 안 되셨을 분들을 위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과거 시점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해보겠습니다.


"2028년에 미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


이 말은 명제의 기본 성질에 의해 반드시 참과 거짓 둘 중 하나여야만 하겠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8년이 되었는데 실제로 미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과거 시점에 뱉은 말은 참이었던 거겠죠. 다시말해서 올림픽이 개최된 사건은 과거에 제가 내뱉은 명제가 참이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바로 디오도로스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미래는 그저 정해진 대로 흘러갈 뿐이겠죠.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같은 디오도로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디오도로스의 주장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인간의 삶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정론적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제론의 9장을 통해 그의 주장을 반격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디오도로스의 논증을 무너뜨리는 작업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디오도로스는 명제의 기본적인 성질 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인데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명제론 1장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언뜻 당연한 말 같기도 하고, 어딘가 심오해 보이기도 하는 아리송한 문장이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이 아닐 수 없는데요.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령 우리의 눈 앞에 사과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과를 보며 빨강색이라는 감각적 인상을 느끼기도 하고요, 혹은 원숭이를 떠올리는 보다 복잡한 사고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직 머릿속에만 머무르고 말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이며,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마음속에 일어난 바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쉽게말해서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볼 때 그것이 함축한 속성을 일단 마음 속에 일차적으로 품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나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그것들을 표현해냅니다. 가령 '저 사과는 빨강색이다, 혹은 저 사과는 원숭이의 엉덩이 색깔과 비슷하다 라고' 말이죠.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언어란 인간이 자신의 마음에 떠오른 바를 표현해내기 위해 사용한 상징물이었던 것입니다. 복잡한 인식론적인 설명은 차치하고 조금 단순히 해석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이란 외부 대상, 혹은 외부 세계를 그대로 표현해내기 위한 도구적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 책 명제론이 포함된 그의 논리학 묶음집 이름은 도구를 뜻하는 오르가논이었죠.)



아무튼 이쯤됐으면 여러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를 간파했을 것입니다. 외부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말이고, 그 중에서도 참 거짓으로 판별 가능한 것이 명제라면 명확한 대상이 없는 경우 명제 역시 존재하기 어렵겠죠. 그렇다면 이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또 다른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시말해 외부 대상이 없을 때 명제가 성립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전제가 없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해 단정적 진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제의 기본적인 성질을 통해 디오도로스의 의견을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디오도로스의 결정론적 가치관을 제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래 명제란 우연명제였습니다. 우연명제란 필연적으로 참이나 거짓이 정해진 명제가 아니라 참과 거짓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우연성을 지닌 명제를 뜻하는데요.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 운명에 쫓겨 살아가는 한계적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미래를 채워나가는 자유로운 주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작 미래명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간의 자유가 실격되기도 하고 또 금방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이 흥미롭지 않나요. 하지만 그들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 속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디오도로스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전제가 선행하지 않는 경우 미래 명제는 참고 거짓이 정해지지 않은 우연명제로만 남는 것처럼, 현재 시점에서 아무런 노력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도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우연성으로만 가득하겠죠. 이러한 상황에서 마치 미래는 다 정해져 있는 것이라 여기고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끼워 맞춰 살아가는 이들은 다름아닌 디오도로스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반면 자신이 뜻하는 미래를 만들고자 부단히 오늘 하루를 애써 일하는 사람들은 노력이라는 전제를 통해 미래의 우연성을 제거해나가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래 시점에 이루고자 하는 명제를 댓글로 달아보는 거죠. 그리고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들기 위한 전제를 오늘부터 하나씩 천천히 쌓아 나가신다면 언젠가 우리 모두 디오도로스적 삶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적에 유튜브도 한 번 들러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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