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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r 11. 2020

소수자가 불편한 당신에게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Uq5TmtpsW0o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신념을 갖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동성애에 대해 우리 모두 다른 주장을 펼칠 수 있고, 또 현 정부에 대한 평가도 사람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죠. 우리는 분명 이같은 의견 차이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오랜 시간 학습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신념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그러했고,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러했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신념과는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아주 불편한 신념들도 꼭 존중해줘야만 할까요? 사회의 안전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불편한 신념들은 아예 멸절하는 편이 더 이롭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이에 대해 과감히 그렇지 않다고 외친 사상가가 한 명 있었습니다. 사상의 자유와 인간의 다양성을 예찬했던 19세기의 명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입니다.







밀은 1806년 영국 런던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학자 제임스 밀로서 우리가 흔히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알고 있는 제레미 벤담과 학문적 동지였죠. 밀은 아버지의 인연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벤담으로부터 수학하며 공리주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밀은 시간이 지날수록 영국의 시인 워즈워스의 작품에 크게 감명을 받고는 점차 낭만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게 됩니다. 청소년기의 밀은 1823년 열일곱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며 무려 35년 가량 근속하게 됩니다. 그러한 영향 탓이었는지 <자유론>을 포함한 그의 저술 곳곳에서 이따금씩 제국주의적 성향이 발견된다는 점은 오늘날 그를 비판하는 근거로도 곧잘 애용되고 있죠. 이후 1865년, 말년의 밀은 하원의원으로 정치계에 나서며 여성참정권, 노동자계급의 선거권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공약을 주장했으나 실현하지는 못했고요, 곧이어 선거에서 낙선한 뒤 1873년 생을 마감합니다. 대표저서로는 <자유론>을 비롯하여 <타인의 행복>, <공리주의>, <여성의 종속> 등 다수의 저서가 있습니다.




이 중 오늘 살펴볼 <자유론>은 1859년, 그의 나이 53세에 발간된 책으로서 그의 저서 중 가장 탁월한 책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 책입니다.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과연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기준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며 공격하곤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밀은 자유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주장을 전달하고자 책의 목차를 다음과 같이 구성합니다.



목차를 간단히 소개해드리면 이렇습니다. 먼저 1장에서 밀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 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고요. 이어서 2장은 주장의 근거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앞서 말한 자유를 사상과 토론의 자유로 구체화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나아가 3장은 사상의 자유라는 밀의 주장을 통해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밀은 그것이 다름 아닌 개성의 실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4장에서는 개인의 자유에 대해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 조건, 즉 우리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범위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고요. 끝으로 5장에서는 1, 2, 3, 4장의 내용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며 실생활에서 인간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 침해받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논의를 마칩니다.


이번 포스팅은 이러한 자유론의 목차를 따라 내용을 전달하되 다만 다소 지엽적인 내용들은 생략하고 핵심적인 논리 위주로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밀에 따르면 오늘날 개인의 자유가 침해 받는 양상은 과거와는 크게 다릅니다. 지배자 계급과 피지배자 계급이 명확하게 양분되었던 과거에는 오로지 지배자 계층으로부터 피지배자의 자유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그에 따라 지배자 계급의 절대적인 권력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론을 통해서 말이죠. 즉 다수의 여론이 소수의 의견을 쉽게 묵살하고 짓밟는 일이 성행하게 된 겁니다. 밀은 이러한 현상을 토크빌이라는 프랑스 학자의 말을 빌려 다수의 폭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자유로운 다수가 자유로운 소수를 억압하고 몰아붙이는 현상을 나타낸 것인데요. 이를테면 오늘날 성소수자나 종교적 소수자들이 괄시 받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밀은 이러한 현상이 모두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거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밀의 주장은 대단히 간단명료합니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여기서 밀이 뜻하는 자유란 무엇일까요? 밀은 자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의식의 내면적 영역으로서 자유로운 의견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가리키고요, 둘째는 취향의 자유로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을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를들어 제가 제 방의 침실에 레이스 커튼을 달든 유아용 모빌을 달든 그것은 저의 자유라는 거죠. 마지막으로 셋째는 단결의 자유로서, 말 그대로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내가 단결할 수 있는 자유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 모든 자유들은 앞에서도 말했듯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들이겠죠. 그런데 이 중에서도 밀이 가장 중요시했던 자유는 바로 첫번째 의식의 내면적 영역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취향의 자유나 단결의 자유는 부차적인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쉽게말해서 100명중에 99명의 의견이 같고 단 한 명만 반대 의견을 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한 명의 의견을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대의견이 취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은 크게 세가지가 있겠죠. 첫째는 실제로는 반대의견이 진리인 경우가 있을 수 있고요, 두번째는 실제로도 오류인 경우,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일부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밀은 이러한 세 가지 가능성을 따로 구분하며 그에 따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 첫번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반대 의견이 실제로는 진리인 경우입니다. 다시말해 다수의 의견이 실제로는 거짓이고 단 한 명의 반대 의견만이 진리에 해당하는 상황인데요. 밀은 그 예시로 소크라테스를 제시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당시 많은 청년들과 진리를 찾기 위해 토론을 나눴고, 귀족들은 그것이 아테네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라 하여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이르게 하죠. 하지만 알고 계시다시피 오늘날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의 원류라는 칭송과 더불어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존경받고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듣기 불편한 사상을 펼치는 이들도 훗날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은 없는 셈이죠. 따라서 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는, 어떤 사실을 다수가 지지한다 하여 그 사실이 필연적으로 진리는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무오류의 독단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오류란 나에게는 절대 오류가 없을 거라는 가정을 뜻하는데요. 무오류의 독단을 범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신념이 사실은 틀릴 수도 있다는 반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경청하고자 하는 관용의 자세도 갖지 못하겠죠.



다음으로 두번째는 반대 의견이 실제로도 오류인 경우입니다. 이경우는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소수의 반대 의견이 실제로도 오류라면 우리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밀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떠한 반대론도 허용하지 않고 특정한 진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맹신이자 신봉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한 번 종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를테면 A라는 종교가 있고, 여러분은 A 종교를 믿는 신도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A 종교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으로부터 부단하게 A 종교의 진리성을 변호하겠죠. 그러한 과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A 종교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차츰 줄어들 것이고, 뿐만 아니라 A 종교의 교리나 기타 신학 체계 등이 질서를 잡아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몇 세대 후 이제는 더 이상 A 종교에 대한 반대 의견이 없어졌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A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전에 어떤 반대 의견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제 그들이 A 종교를 믿는 이유는 그저 옛날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던 교리 때문에, 혹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믿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즉 자신만의 합리적인 사유 능력과 이성을 통해 진리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이를 통해 밀이 말하고자 했던 진리의 본질은 참된 진리란 반대 의견과의 끊임없는 논박 속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모든 반대 의견을 묵살한 채 따르는 진리는 맹목적이고 교의적인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어서 마지막 세번째는 반대 의견이 일부의 진리를 포함할지도 모르는 경웁니다. 사실 인간사에서 수많은 명제들은 절대적으로 진리이거나 거짓이기 보다는 다소간의 진리와 거짓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경우가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거짓에만 집중하여 그 전체를 폐기처분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함축한 진리도 같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밀은 이 같은 세가지 상황에 대한 각각의 반박을 통해 소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밀의 주장 대로 소수의 의견도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겠죠.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사상의 자유를 중요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밀의 행복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밀은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이 최대로 실현되고 또한 스스로가 적극적인 사유 주체일 때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일 그 반대로 우리 모두가 획일화된 관습과 여론에 침식 당하여 독창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이 세상은 다양성이라는 빛을 잃고 끝내 정체될 것이라 염려한 것이죠. 다시말해서 밀은 우리 모두가 자기만의 사유를 행사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결정하며, 그러한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야말로 바람직한 사회 모습이라는 점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개인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해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밀은 크게 두 가지 조건을 제한 사항으로 내세웁니다. 첫번째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땐 특정한 행위를 실행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도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타인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폭력이라는 행위를 직접 실행함으로써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죠. 반면 범죄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증언을 거절하거나, 혹은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경우는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밀은 이러한 사항들을 모두 면밀히 고려해야 비로소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날 여러 학자들은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얽힌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개인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를 선명하게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며 밀의 의견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어서 두번째 조건은 성숙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한 근거로 밀은 어린 아이를 예시로 제시합니다. 어린 아이는 아직 판단력도 미숙하고 자신만의 주관과 개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죠. 따라서 어른은 어린 아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사유 주체가 되도록 교육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 밀의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밀은 과연 어린 아이가 성숙한 상태에 도달하는 시점이 정확히 언제냐 하는 지적을 받기도 했죠. 게다가 그는 당시 식민 통치 하에 있던 여러 국가들을 마치 어린 어이 같은 미숙한 상태로 간주하며 제국주의의 당위성을 합리화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자유론에 담긴 밀의 논리를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해봤습니다. 논의된 사항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있다. 만일 사상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거나, 혹은 우리가 지금 따르는 진리를 아무런 근거 없이 맹신하는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모든 사람들의 개성과 다양성이 자라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토양에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의 주인, 나아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것이고,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서만 우리의 미래는 발전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는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성숙한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조건을 만족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권력도 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며, 모든 개인은 자신의 정신에 대하여 주권자이다.



이상이 자유론의 굵직한 흐름입니다. 여러분은 글을 읽으며 사상의 자유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과연 오늘날 우리가 다시 자유론을 꺼내 들어야 할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저는 두 가지를 말씀 드리고 글을 마치려 합니다.


첫번째는 다소 진부하게 들리시겠지만 다름아닌 관용의 자세입니다. 관용이란 타인의 신조나 사상을 허용하고 인정할 줄 아는 태도를 가리키죠. 하지만 수많은 진영논리가 판을 치는 현대 사회에서 관용은 유치한 교훈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판단만이 진리라 확신하는 무오류의 독단자들에게 관용 만큼 거추장스러운 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독단자들 모두에게 존 스튜어트 밀은 단호히 경고합니다. 당신이 따르고 믿는 진리가 실은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죠. 또한 진정한 진리는 확신이 아닌 의심 가운데서 꽃을 피운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자유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이어서 두번째는 자기 생각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밀에 따르면 많은 현대인들은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신 관습적이고 교의적이며, 다수가 신봉하는 진리, 이른바 남이 만든 진리만 모방하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학생들에게 대학은 당연히 가야하는 곳이 되어버렸고, 비싼 돈 주고 장만한 자동차는 온통 흰색 아니면 검정색 뿐이며, 추운 겨울철 롱패딩은 검정색이 아니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죠. 이처럼 우리는 남들과 다르기 보다 동일하길 희망하고, 독특하기 보다 무난하길 바라며, 비범하기 보다 평범하길 갈구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나부터가 타인에게 관용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맞이한 역풍은 아닐까요? 그리하여 꼭 다같이 평범하자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네 삶이 이리도 정형화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관용이라는 가치를 우리 사회 안에 다시금 되살려 놓지 못한다면 언젠간 개성과 다양성이라는 말조차 사상범의 구호로 전락해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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