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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pr 05. 2020

습관적 존재의 참의미

라베쏭, 『습관에 대하여』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4-hkvK_QyYw

포슽



오늘도 여지없이 아침 여섯 시 경 잠에서 깨어납니다. 늘 그랬듯 정수기 앞으로 성큼 걸어가 시원한 물 한 잔을 들이키고요. 아침 식사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과일 샐러드를 먹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엔 여느 때처럼 몸을 씻고 외출 준비를 합니다. 잠시 후 집을 나선 저는 늘 걷던 길을 따라 지하철로 향합니다. 곧 역사에 도착한 제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자리는 어제와 같은 자리였으며. 용무를 마친 후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아침과 같은 길이었습니다. 이렇듯 저의 하루는 특별히 새로울 것 없이 늘 해왔던 과거의 것을 반복하는, 과거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습관이 우리 삶의 커다란 일부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마 여러분들도 충분히 납득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습관이 인간의 일부이기만 할까요. 평생을 게으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게으름이란 그의 일부가 아닌 본성 그 자체이진 않을까요. 다시 말해 그는 그저 하나의 게으른 습관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는 아닐까요. 생명의 존재방식을 습관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오늘의 책 라베쏭의 <습관에 대하여>입니다.





라베쏭은 1813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철학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스물 두 살의 어린 나이로 당시 학계의 큰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그가 한 아카데미에 제출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문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쓴 논문은 아카데미에서의 수상은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읽힐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죠. 이 밖에도 그는 미술에도 큰 재능을 보이며, 들라크, 앵그르 등의 인물과 더불어 프랑스 미술 교육을 개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라베쏭은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앙리 베르그송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혹시 베르그송의 사상이 잘 이해 안 가시는 분들에겐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습관에 대하여>는 그가 불과 스물 여섯 살 때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논문은 겨우 서른 세 쪽의 짧은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밀도 높은 논리를 담았으며, 그 결과 프랑스 학계에 일대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논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습관으로서 존재한다. 다시말해 습관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속성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방식 그 자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와닿지 않죠. 지금부터 천천히 그의 논리를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이 구성했습니다.



맨 먼저 라베쏭이 사유한 습관의 성질을 소개해드릴 거고요, 그 다음으로 습관을 기준으로 물질과 생명의 차이를 살펴볼 겁니다. 그러고 나서 인간의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마저 소개해 드린 후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제가 이전에 다뤘던 책들보다 조금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지적 유희는 더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라베쏭은 습관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획득된 습관, 또 하나는 형성된 습관인데요. 획득된 습관이란 외부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만들어진 습관을 가리키며, 형성된 습관이란 우리가 능동적으로 훈련하여 주체적으로 쌓은 습관을 가리킵니다. 다시말해 획득된 습관의 원인은 외부에 있고, 형성된 습관의 원인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깜깜한 밤에 길을 걸을 때면 처음엔 흐릿했던 시야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경험하죠. 이는 우리 눈의 암반응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즉 획득된 습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미식가들이 섬세하게 맛을 분석하는 능력이라던가, 혹은 빠르게 암산하는 능력 등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훈련하여 성취해낸 형성된 습관이라 할 수 있죠. 이러한 두 가지 양상의 습관 중 라베쏭의 주된 관심은 단연 형성된 습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형성된 습관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이라 여겼기 때문인데요.


그가 파악한 습관의 주요 성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그는 습관이 시간 속에서만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안정적으로 자전거를 탈 수 있기 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죠. 즉 습관이란 반드시 시간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에 스며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습관이 깃들기 위해서는 단일성이 필요합니다. 가령 인간은 여러 신체 기관의 종합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단일한 존재를 이루고 있죠. 따라서 자전거를 배울 때 점차 우리 몸속으로 스며드는 균형감은 우리의 몸 전체, 즉 여러 기관의 종합인 동시에 단일한 존재에 스며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습관은 자발성을 요구합니다. 즉 외부 환경을 그대로 수용하기만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반응할 때 습관이 형성된다는 거죠. 이를테면 자전거가 넘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반응하는 우리의 자발적인 능동성이야 말로 습관을 이끄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질들을 기준으로 물질과 생명을 비교해보겠습니다.




1) 시간성


먼저 시간입니다. 라베쏭은 물질이 시간 밖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이 겪는 변화는 시간에 따른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일순간 발생하는 도약이라는 것인데요. 조금 어려운 이야기이므로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물이 든 컵을 방 안에 두면 점차 증발하여 사라지죠. 이때 인간의 시선으로는 시간에 따라 물이 사라지므로 물이 겪는 변화가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물의 분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액체 물이 기체로 변하는 순간은 결코 측정할 수 없는 찰나에 발생하는 급진적인 도약입니다. 즉 액체 물이 순식간에 기체로 도약한다는 이야기죠. 따라서 라베쏭은 물질의 변화가 시간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인간은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자기동일성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이를테면 여러분들은 1분전의 여러분 자신과 지금의 여러분 자신이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죠. 이처럼 생명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음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으므로 생명은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이 라베쏭의 입장입니다.



2) 단일성


다음으로 단일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끝없이 떨어지는 폭포는 하나의 단일한 존재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폭포를 구성하는 것은 개별적인 물방울들이며, 폭포는 그저 물방울이 떨어지는 개별적 현상의 종합일 뿐이죠. 그렇다면 물방울들은 하나의 존재라 할 수 있을까요. 다시말해 우리는 이것들을 한 개 두 개 하며 셀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물방울도 그보다 더 작은 물방울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죠. 다시말해 폭포는 단지 수많은 물방울들의 총합일 뿐이며 그 물방울 또한 마찬가지로 끝없이 미분되는 양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폭포를 이루는 물방울들이 서로 동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달리 생물의 부분들은 결코 동질적이지가 않죠. 이를테면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신체 기관들은 저마다 맡은 기능과 역할이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 간에 이질성을 보입니다. 라베쏭은 이를 이질적 단일성, 즉 유기화라 칭하며 생물의 중요한 특징이라 이야기하는데요. 이것이 그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생물들이 유기화를 통해 단일한 개체를 이루어 자신만의 독립적인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유기화를 통해 하나의 개체로 존재할 수 있고, 또한 남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3) 자발성


이제 마지막으로 자발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공 하나를 주고받는다 해보겠습니다 이 때 공은 수없이 공간 운동을 반복하고 있죠. 하지만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공은 스스로 그 운동을 실행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공을 던지지 않으면 공은 날라가지 못하는 거죠. 이처럼 물질은 자발적으로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죠. 바로 여기서 물질과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물질은 오로지 외부 세계의 자극에만 그대로 반응하는 수동적인 객체이지만, 생명은 외부 세계의 자극에 저항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물질은 외부 자극에 그대로 굴복하는 필연적 법칙을 따르는 반면, 생명은 외부 변화에 의지로서 대항하는 자유의 법칙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생명이 그저 자유롭기만 한 존재일까요. 섣불리 그렇다고 답하기엔, 우린 타인의 말에 쉽게 상처 받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에 괜스레 기분이 우울해지기도 하죠. 이처럼 생명은 외부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능동성과 더불어 수동성 또한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과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라베쏭의 흥미로운 사유가 시작됩니다. 생명도 실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발상이죠. 사실 과학적으로도 생명은 수많은 원소의 집합인 것은 자명합니다. 따라서 생명은 생명 본유의 능동성과 더불어 물질로 인한 수동성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라베쏭은 생명을 능동과 수동의 대립 속에서 파악합니다. 예를들어 같은 생명이라 하더라도 식물은 아직 수동성이 훨씬 크게 나타나는 존재고요, 인간이야 말로 능동성이 극도로 고양된 단계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즉 능동과 수동의 대립 중 능동성이 더 우세해질수록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이 라베쏭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능동성으로 충만한 인간에게 습관은 어떤 매커니즘으로 흡수되는 걸까요. 이를 설명하는 라베쏭의 논리는 워낙 복잡해서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내 보겠습니다.



먼저 ‘A’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또한 ‘A’에게는 달성하고 싶은 목표 행동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전거를 배우는 것이 ‘A’의 목표 행동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A’는 자전거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넘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일 겁니다. 그 이유는 ‘A’와 목표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존재하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간격이란 ‘A’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종의 저항으로서 간격이 넓어질 수록 넘어질 것 같은 불안함도 커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끝없이 자전거에 올라타겠죠. 이것을 바로 ‘운동’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 ‘A’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계속해서 운동하지만, 자꾸만 넘어질 것 같다는 저항을 받는 거죠. 그러나 ‘A’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넘어질 것 같다는 수동적인 감정을 견뎌내며 계속해서 운동하려는 능동성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A’가 수동성을 극복하고 능동적인 행동을 하려 할 때 ‘A’는 스스로가 ‘노력’하고 있다는 인식을 얻게 되는데요. 그 인식은 바로 ‘A’에게 의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A’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수없이 반복 운동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이윽고 ‘A’는 자전거를 탈 때 넘어질 것 같다는 저항도 못 느낄 것이고, 따라서 노력하고 있다는 인식도 사라질 겁니다. 그리하여 ‘A’의 운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즉 자전거와의 간격도 사라지고 자전거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던 ‘A’의 운동은 이제 의지를 넘어 하나의 본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를 라베쏭은 습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몸에 각인된 제2의 본능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개념을 확장해봅시다.


인간은 신체활동과 정신활동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체활동이라 함은 보고 듣고 만지는 지각과 감각을 가리키고요, 정신활동이라 함은 판단하고 사고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사유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두 활동의 경험으로서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는 거죠. 그런데 라베쏭에 따르면 이 모든 활동들은 단지 제2의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즉 최초의 저항을 거스르고 형성된 습관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쉽게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만지는 기초적인 감각부터 보다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에 이르는 모든 활동들은 단지 끝없는 반복 가운데 형성된 습관들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한 라베쏭의 견해를 따른다면 인간은 그저 습관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능동과 수동의 대립에서 끝없이 노력하는 존재이며, 그러한 가운데 보고 듣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의 모든 운동들은 습관으로 자리잡아 인간을 구성하는 제2의 본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라베쏭의 논문 <습관에 대하여>를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입니다. 라베쏭에 따르면 인간은 다만 습관적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습관의 범위는 신체적인 것부터 정신적인 활동을 모두 망라하죠. 가령 다른 사람을 일상적으로 미워하거나, 혹은 반복적으로 거짓말하는 것 등이 모두 우리의 습관이자 제2의 본성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지닌 안 좋은 습관을 자신의 본성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늦잠 자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정작 스스로를 부지런한 사람이라 여기거나, 친구를 뒷담화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실은 본인을 정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하는 등 그 예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습관이 그들의 일부일 뿐이며, 언제든 맘만 먹으면 습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라베쏭은 습관이 제2의 본성이라 말했죠. 즉 습관이 한 번 우리 몸에 형성되고 나면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넘어 독자적인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습관은 그 자체로 우리의 정체성이자 능력입니다. 매사에 미루는 습관을 가지는 사람의 몸 속 깊은 곳엔 이미 게으름이 생명을 뿌리 박았을 것이고, 남을 헐뜯는 습관을 가진 사람의 내면엔 증오가 싹을 틔웠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라베쏭이 인간을 습관적 존재라 한 것은 인간이 습관에 굴복 당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습관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표로 나아가는 운동이 때로는 버거울지라도 끝없이 저항을 극복하고, 그리하여 노력하는 존재로 남을 때만 비로소 생명적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저항에 굴복하여 필연적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물질의 삶을 택할지, 끝없이 운동하며 새로이 습관을 창조하는 생명의 삶을 살아갈지 말이죠. 


행동은 곧 우리 자신입니다. 이제 이 글을 다 읽은 다음, 어떤 행동을 하실 건가요.


오늘도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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