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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pr 15. 2020

차갑게 분노하기

세네카, 『화에 대하여』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kZO1YTyHfos



인간은 다양한 감정을 느낍니다. 행복, 슬픔, 두려움, 혐오, 분노, 놀라움 등등 이러한 감정 덕분에 인간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청혼을 받고 무한한 행복감을 누리는 모습이나,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마치 내 일처럼 슬퍼하며 위로해줄 수 있는 것들이 모두 감정 덕분이라 할 수 있죠. 즉 외부의 사건은 우리의 감정이 개입됨으로써 비로소 나만의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남들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보다 많은 사건을 의미 있게 경험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유독 한 가지 감정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부정적인 결과로 이끌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바로 분노라는 감정입니다. 오늘날 발생하는 수많은 비극들은 한순간의 분노에서 출발할 때가 많죠. 분노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말 대로 때로 인간에게 분노가 강력한 동기일 지도 모른다는 건 꽤나 설득력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려 2천년 전의 한 철학자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데 티끌 만큼의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본성과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죠. 그러므로 분노로써 자기 자신을 소비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오늘의 책,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입니다.







세네카는 기원전 4년 지금의 스페인 코르도바 지방 부근에서 태어납니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덕에 어렸을 적부터 수사학과 변론술 등을 공부하며 정치계에 입문할 기틀을 닦게 되었죠. 그 중에서도 세네카가 깊이 심취한 학문은 단연 스토아 철학이었고,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후기 스토아 철학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네카는 타고나기를 허약하게 태어난 탓에 20대를 내내 요양하며 보내야 했고, 결국 34세라는 당시로선 늦은 나이에야 재무관으로 정치계에 입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모종의 음모에 연루되는 바람에 당시 로마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의 명을 받아 약 8년 간의 유배 생활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8년 간의 유배생활 중 총 세 권의 글을 남겼고, 이번 포스팅에서 다룰 <화에 대하여>도 그 중 한 권으로 전해집니다. 아무튼 그 이후 세네카는 다시 로마의 부름을 받아 유배 생활을 마치고 황실로 돌아갑니다. 황실에서 세네카가 맡게 된 역할은 훗날 로마의 폭군으로 자리매김할 네로의 가정 교사였죠. 세네카는 네로가 황제가 될 때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으며 황제가 된 이후에도 약 10년 간 네로의 정치적인 조언을 하며 네로 황제를 보필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네로 황제의 폭정이 심해지며 둘 사이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끝내 네로는 세네카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세네카에게 자살을 명령합니다.



세네카는 담담하게 발목의 정맥을 끊고 독약을 마시며 죽음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세네카는 약 70년의 인생을 제대로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책 <화에 대하여>는 그 저자가 세네카라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천성적으로 병약했던 신체와, 수차례의 누명, 8년 간의 유배, 그리고 한 때 제자였던 사람에게 죽기까지 상식적으로 그의 삶은 분노로 넘쳐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시련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련 속에서도 분노하지 않을 것을 당부했고, 나아가 우리 삶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주는 건 분노가 아닌 이성임을 강조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동생 노바투스에게 보낸 세네카의 편지글입니다. 세네카는 이 편지를 통해 화를 다스리는 법을 동생에게 알려주려 했던 건데요 세 권의 편지 중 1, 2권은 화의 성질과 본질에 대한 고찰을, 그리고 3권에는 화를 치유하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본 포스팅에서는 여러분의 용이한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습니다. 맨 먼저 세네카가 가리키는 화가 무엇인지 그 범위를 한정할 거고요, 나아가 인간이 이러한 화에 사로 잡히는 과정과 원인을 살펴볼 겁니다. 그 다음으론 그 같은 화의 부정적인 속성들을 소개해드릴 거고요, 마지막으로 우리 안에 자리잡은 화를 치유하는 방법을 살펴봄으로써 포스팅을 마칠 예정입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우리 일상에 만연한 분노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세네카는 분노를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먼저 ‘화가 나는 것’이란 외부 작용에 따른 자연스런 인간의 반응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꽃가루가 목에 들어가 기침을 하거나 추위에 떨며 몸을 웅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화가 나는 것’이란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인상이자,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화를 내는 것’이란 앞서 선행된 인상, 즉 ‘화가 났다’는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어 외부로 분노를 표출하는 이성의 선택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화를 내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서 비롯된 능동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세네카가 이 둘 중 경계한 ‘화’는 바로 후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후 영상에서 언급되는 ‘화’는 모두 능동적인 행동으로서의 화를 가리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세네카에 따르면 인간이 ‘화’에 사로잡히는 과정은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로 인상이란 앞서 살펴본 수동적 차원에서 ‘화가 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외부 작용에 따른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죠. 이를테면 누군가 나를 폭행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러한 인상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 또 하나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판단을 근거로 화를 내기로 결심하죠. 이것이 바로 이성의 선택 과정입니다. 즉 인간이 화를 내는 것은 오로지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처럼 인상과 선택의 과정이 자주 반복될 경우 더 이상 인간은 화를 선택적으로 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선택 과정은 사라져버리고, 화가 나는 인상만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화를 내는 상태, 즉 통제 불능의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네카는 ‘화’를 경계하지 않으면 화에 지배당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에 따르면 ‘화’는 다음과 같은 속성들을 갖습니다. 첫째로 화는 무척이나 잔혹한 결과를 불러오기 쉽습니다. 당장 사회면 뉴스만 보더라도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는 기사들이 적지 않죠. 이에 대해 세네카는 말합니다.


즉 이성을 쫓는 인간이라면 따르지 않았을 법한 행동을 화에 사로잡힌 인간은 과감히 실행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통제불가성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화의 과정’에서 잠시 언급된 내용이죠. 세네카는 우리가 자꾸 화를 내기로 선택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화를 선택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자동적으로 화가 나는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른다고 봤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란 자주 향하는 쪽으로 물들기 쉽다는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성을 쫓는 인간의 마음은 이성으로 물들고, 정념을 쫓는 인간의 마음을 정념으로 물들기 쉽다는 건데요. 따라서 자꾸만 화를 내다 보면 우리의 마음도 ‘화’로 물들어서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화를 내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번째는 화의 무효용성입니다. 즉 화는 우리 삶에 쓸모 있는 결과를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인데요. 이에 대해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화의 관심은 진실을 밝혀내거나 문제를 공정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화 자체가 화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세네카의 주장은 명료해졌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잔인하고 통제불가하며 게다가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화가 날 지언정 화를 내지는 말라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화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그가 제시한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분노를 유예하는 것입니다. 앞서 세네카는 화를 내는 것이 이성의 능동적인 선택이라고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인상이 너무 강렬한 경우, 다시 말해 화가 극도로 났을 때는 선택 과정에 이성이 아닌 ‘화’가 개입될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도로 화가 난 경우엔 잠시 선택을 유예하여 이성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세네카의 첫번째 조언입니다. 두번째는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방법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스토아 철학 특유의 아파테이아 정신에 뿌리 박은 것으로서 우리 안의 ‘화’를 다스리는 보다 본질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스토아 철학은 인간의 마음을 물들기 쉬운 것으로 간주한다 했었죠. 이때 인간의 마음을 물들일 수 있는 가능성은 단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념, 또 하나는 이성이죠. 스토아 철학은 우리의 마음을 오직 이성으로 물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이로써 우리의 마음이 정념으로부터 해방된 상태, 그것을 바로 아파테이아라 합니다.


그럼 자연히 이러한 질문이 뒤따를겁니다.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이성으로 물들일 수 있을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로지 우리의 이성이 옳다고 판단한 일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이 반복될수록 우리의 마음은 이성이 내린 판단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고, 끝내 우리는 ‘화’라는 정념에 흔들리지 않는 아파테이아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를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세네카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적잖은 교훈을 줍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커다란 분노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혐오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남혐과 여혐, 노인 혐오와 유아 혐오, 나아가 특정인에 대한 무차별적 혐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마치 분노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분노의 화신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분노가 괜한 분노가 아니라고 항변할 겁니다. 이를테면 남자들이 이랬다, 여자들은 이런다, 노인들은 저렇다, 아기들은 저런다 등등. 사람들은 수많은 이유 때문에 화가 나고, 또한 화를 냅니다. 하지만 세네카는 설령 정당한 이유들로 인해 화가 날지라도 화를 내는 것으론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야기합니다. 비록 정당하게 분노해야 할 때 조차도 오직 수동적인 의미로서만 분노할 뿐 차가운 이성을 갖고 문제에 다가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네카에 따르면 촛불 혁명 조차도 화가 난 사람들의 이성적인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의 불길이 꺼지지 않는 것은 분노에 분노로만 맞서려는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감정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또한 감정은 진실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문제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뜨거운 가슴과 더불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가운 이성을 고루 갖추기를 소망해야 하진 않을까요. 베트남 출신의 승려 틱낫한 스님의 이야기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화를 낼 때 먼저 다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라는 거죠. 정의로운 분노와 더불어 냉철한 이성이 함께하지 않으면 결국 다치는 건 나 자신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뜨거운 분노 대신, 차가운 분노가 우리의 지향점은 아닐까요.


오늘도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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