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라는 징검다리를 걸으며 우리는 세상과 새롭게 만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고통을 피하려 애쓰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마주한 것이었고,
그다음은 외면해 봐야 소용없다는 체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삶은 고통을 통과하며 깊어지고, 고통은 삶을 다시 보게 만드는 문이라는 것을.
내가 아플 때 발견한 것
작년 겨울, 독감에 걸려 사흘간 침대에 누워있었다. 열이 40도까지 올라가면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픈 동안 평소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밖 까치 소리가 이렇게 선명했나? 벽에 걸린 시계 소리가 이렇게 또렷했나? 심지어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렸다. 마치 감각의 볼륨이 갑자기 최대로 올라간 것 같았다.
회복된 후에도 이 경험이 계속 따라다녔다. 아프기 전엔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갑자기 소중해 보였다. 아침에 눈뜨는 것, 숨 쉬는 것, 걸을 수 있는 것.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몇 달 후, 건강검진 때문에 병원에 갔다. 대기실에서 옆에 앉은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젊은이, 어디 아파서 왔나?"
"검진받으러 왔어요. 할머니는요?"
"나? 암이야. 3기래."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할머니는 마치 날씨 얘기하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처음엔 막막했는데, 이제 하루하루가 선물 같아. 손자가 어제 그림 그려줬거든. 개똥 같은 그림인데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할머니가 핸드폰에서 꺼내 보여준 그림은 정말 형편없었다. 집인지 사람인지도 모를 낙서였다. 하지만 할머니 표정이 너무 밝아서, 나까지 웃음이 나왔다.
그때 깨달았다. 고통은 우리 일상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 준다.
평소엔 '그냥 하루'였던 것이 '소중한 하루'가 되고,
'당연한 건강'이 '기적 같은 건강'이 된다.
같은 현실인데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읽힌다.
친구가 보내온 "밥 먹었냐?"는 문자. 아프기 전엔 그냥 인사였는데, 이젠 "네가 걱정돼"라는 마음이 보인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도 그랬다. 예전엔 "또 미역국이야?"였는데, 이젠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구나"로 들린다.
상처받은 자리에는 구멍이 뚫린다고 생각했다. 뭔가 빠져나가고 부족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상처는 오히려 창문 같았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다.
고립과 원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고요함 속에서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실패를 무서워해서 안전한 길만 걷던 내가, 이제는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안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게 강한 거라고 생각했다. 웃으면서 "별거 아니야"라고 하는 게 멋있는 거라고.
근데 정작 강한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아프다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울고 싶을 때 울었다.
약해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가짜 강함보다 진짜 연약함이 더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는 말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의 진실임을 이제 안다. 고통은 우리를 부서뜨리려 하지만, 동시에 더 깊고 넓은 사람으로 다시 세워주기도 한다.
아픔을 지나온 자리엔 늘 무언가가 남는다. 그것은 때로 상처이고, 때로는 빛이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려는 우리의 의지다. 고통을 겪고 나니 확실해진 게 하나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연약해도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