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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드 Sep 29. 2023

아이에게 배운다

“엄마, 추석선물세트 비싸요?”

“응? 어떤 선물이냐에 따라 다르지? “

“한우, 그거 비싸요?”

“좀 비싸지. 그런데 왜?”

“화곡동 할머니한테 한우 추석선물세트 드릴까요?”



용돈은 그렇게 사용하는 거라고 말했다. 양가 부모님 댁 방문, 세뱃돈, 생일 및 다양한 기념일에 받은 용돈과 아빠에게 주급으로 받는 돈을 차곡차곡 모은 아이는 그 돈으로 외할머니께 한우를 사 드리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왜 한 건지는 모르겠다. 살짝 물어보니 그냥 해 드리고 싶다고만 말한다. 얼마를 예상하냐 물으니 “30만 원이면 될까요?”

세상에!! 통이 이렇게나 큰 아이였나? 굴비 한 마리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가락 먹고 굴비를 보라고 말한 자린고비만큼이나 구두쇠인 아이가 통 크게 30만 원을 쓰겠다는 것인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첫 날인 9월 28일. 아침을 먹고 친정을 가려고 준비하는데 아이가 부스럭부스럭 거리며 용돈통에서 돈을 꺼낸다. 뭐가 신이 났는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대형 마트를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어디를 가야 하나 어디를 가야 한우 추석선물세트를 살 수 있나? 동네 정육점은 열었을까 싶어 먼저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시간이 9시 조금 넘은 시간이니 열었을지 모를 일말의 희망을 품고!!

다행스럽게 가게 문은 열려 있었고 가게 문 앞에 세워놓은 입간판에는 “올 추석은 한우 선물세트“로 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아이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이다. 뭐가 그리 좋을까. 선물을 준비하는 마음을 아이는 알고 있구나. 선물은 받을 때도 좋지만, 그 선물을 받고 좋아할 상대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과정이 더 좋다는 것을. 상대를 생각하고, 선물을 고르는 그 과정 자체가 기쁨이란 것을.



“한우 선물세트 지금도 가능한가요?”



등심, 살치살, 부채살로 30만 원을 맞춰달라고 부탁한 후 포장이 완료되기를 아이와 기다리고 있었다. 농담 코드가 잘 맞는 우리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고기를 준비하시던 사장님은 “엄마랑 아드님 사이가 참 좋네요.”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또 한 번 웃는다. “엄마, 친구들은 엄마랑 이렇게 이야기 잘 안 하나 봐요. 좀 멀찍이 떨어져서 걷고 그렇더라고요?”

눈과 손으로 아이를 쓰다듬는다. 고마워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줘서….



계산을 마치고 드디어 출발! 설렘이 가득한 공기가 차 안에 가득하다. 이제 출발한다는 전화를 하고, 가족 나들이를 갈 때마다 듣는 볼 빨간 사춘기의 노래를 재생시킨다. “저 오늘 떠나요 공항으로, 핸드폰 꺼 놔요 제발 날 찾지 말아 줘~~” 마치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신나게 노래를 불러제낀다! 볼 빨간 사춘기인 중 2도, 볼 빨간 사십춘기인 나와 신랑도 오늘은 이심전심이다!!!



막힘 없이 뚫리는 길을 달려 드디어 도착!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하는 이의 뒷모습이 이렇게 늠름한 것일까 싶게 당당한 파워워킹으로 할머니 집 계단을 오른다. 한 손에는 한우를 한 손에는 일본 여행에서 이모 주려고 사 온 선물을 들고. 어사화를 머리에 꽂아줘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 혼자 피식 웃어버렸다.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를 안 하는 게 다행이다 싶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인사를 하더니 한우 선물을 높이 들며 “할머니, 한우 추석선물세트 받으세요. 이거 제가 용돈으로 산 건데요, 30만 원 줬어요!” 창피함은 나의 몫인가? 너무 기쁜 나머지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가! 선물을 하는 자신이 너무 대견한 듯한 표정과 말투에 자꾸 웃음이 나오지만 꾹 참는다. 엄마는 감동받은 표정이다. 엄마도 나도 같은 마음이지 싶다. 언제 이리 컸누.



내년 설에는 고덕동 할머니한테 선물을 드릴 거라고, 그때까지 용돈을 더 모으겠다고 한다. (올 추석엔 시부모님 두 분이 여행가신다고 오지 말라하신 덕에 아이는 용돈을 지킬 수 있었다.) 선물을 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단다. “할머니가 동네방네 자랑하시겠죠?” 하며 입이 귀에 걸린다. 주는 기쁨을 알아가는구나.



친구들이 챙겨주지 않아도 늘 친구 생일을 챙기는 아이. 조금도 서운한 마음을 품지 않는 아이를 본다. 선물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라 가르친 보람을 느낀 오늘이다. 어른도 쉽게 열리지 않을 금액임에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흔쾌히 지불하는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뭉클했다. 잘 커줬구나 싶어서. 집에 오는 길, 플렉스 마무리하는 김에 맛있는 아이스크림 사달라는 말에 기분이다를 외치며 아이스크림과 내가 좋아하는 젤리까지 사줬다. 그걸로 오늘의 플렉스는 마무리가 됐다. 한동안 용돈통은 굳게 잠겨있을 것이다. 내년 설까지 설레면서 용돈을 채워갈 아이. 용돈이 채워지는 만큼 아이의 마음도 자랄 것이다.



아이에게 오늘도 배운다. 넉넉한 마음을 배운다. 화가 나도 금방 풀고, 베풂에는 주저함 없는 모습을 배운다. 내 것이지만 기꺼이 나눌 줄 아는 마음을 배운다. 아이는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작은 내 마음에 오늘은 아이가 큰 스승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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