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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진한 브라우니 Oct 06. 2022

고구마를 천천히 구우며

고구마를 천천히 오랜 시간을 굽는다. 오븐 안에서 천천히 구워지며 부풀어 오르다가 어느 것은 소리를 내며 터지고, 어느 것은 줄금이 생기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든다. 그러다가 투명한 물이 조금씩 배어 나오는데 점점 다갈색으로 변하면서 달고나 냄새를 풍긴다. 예전엔 이런 고구마는 날이 좀 더 추워져야 맛볼 수 있었다. 지금처럼 호박고구마니, 베로니카니 하는 품종도 없었고 그저 이렇게 물이 줄줄 흐르며 단내를 풍기는 물 고구마와 퍽퍽한 맛이 묘미인 밤고구마가 있었을 뿐이었다. 요즘은 품종이 다양해져서 꿀처럼 달콤한 고구마를 언제든지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다가 점점 그때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감각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니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 즈음, 가끔 어느 집에서 고구마를 굽는 냄새가 은근히 새어 나오곤 했다. 스산한 바람에 문을 꼭꼭 닫고 이불속을 파고들 즈음을 생각나게 하는 그 냄새는 마음을 푸근하고 따스하게 만들어줬다. 한겨울의 군고구마 장수는 이제 가끔 볼 수 있다. 그것도 번화가로 나가야 겨우 볼 수 있다. 편의점에서 최신 기계로 굽는 고구마가 요즘은 더 눈에 띈다. 맛있을까? 예전에 사 먹던 그 맛일까? 그걸 먹으면 그때가 생각날까?


며칠 전 아들의 구멍 난 바지를 손으로 꿰맸다. 무릎으로 걸어 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새 바지를 입어도 금방 헤어지는 녀석이다. 처음엔 안에서 천을 덧대어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다 뜯어내고 다시 겉으로 뒤집어 구멍 난 곳을 실로 메우기 시작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비슷한 천을 찾아다 동그랗게 오려 양 무릎에 대고

박음질을 했다. 다 마치고 나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아픈 허리를 펴고 한참을 누워 있는데 옛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 때다. 엄마는 곧잘 집에서 재봉틀을 돌리시곤 했다.

부라더 미싱이었다. 요즘처럼 전기코드를 꽂는 것이 아닌, 책상처럼 의자에 앉아 발밑의 페달을 밟아야 움직이던 미싱이었다. 그것으로 옷의 길이를 줄이고, 통도 줄이곤 하셨다. 가끔 레이스를 덧붙여 옷을 화려하게 꾸미 시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내 눈엔 그다지 이뻐 보이지 않았다. 기성복을 고유성을 지닌 양품점의 옷처럼 차별화를 시키실

의도였을까? 왜 엄마는 멀쩡한 옷을 저렇게 우둘투둘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한편에 놓여 있던 라디오에선 최병걸의 노래가 흘렀다. 최헌의 노래도 흘렀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로 시작하는 노래도 나왔다.


어느 가을날, 그날도 엄마는 재봉틀을 돌리고 계셨는데 외할아버지가 오셨다.

농사지으신 붉은 고구마를 쌀가마니로 한가득이고 오셨다. 저걸 어디에서부터 짊어지고 오셨을까? 쌀 한 가마니도 넘을 것 같은 자루를 이고 버스를 타고 내려서 한참을 걸어오셨을까?.. 할아버지는 보라색 저고리에 연한 하늘빛 한복 바지를 입으시고 엄마를 보러 가끔 그렇게 오셨다. 우리를 웃는 눈으로 바라보시곤 했다.

밥을 드시고 나면 숟가락에서 윤이 났다. 그걸 보는 엄마의 눈도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저고리에 달린 서너 개의 호박에 눈길이 갔다.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며 소리를 내던 것이 빛에 반사되면 눈이 부셨다. 저고리를 잠시 벗어놓으셨을 때 호박을 몰래 손에 쥐고 달그락거리도록 만졌다. 아들 많은 집의 딸이었던 엄마는 딸 많은 집의 딸이던 나보다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으셨을까? 당시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마음을 스쳤던 무언가를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어떤 존귀함이었다. 사랑받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존귀함. 할아버지의 윤기 나는 숟가락을 보며 웃는 엄마의 얼굴은 자주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잠시 머물다 가신 뒤, 몰려오는 허기에 고구마를 쪄달라고 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러마고 대답을 하신 엄마는 곧바로 붉은 흙을 깨끗이 씻은 고구마를 커다란 솥에 넣고 찌기 시작하셨다. 미싱을 돌리느라 어수선해진 마루에 누워 달큰하게 익어가는 고구마 냄새를 맡고 있었을 때, 해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점점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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