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김혜자, 원빈, 2008
봉준호 영화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 영화가 봉준호 영화 중 가장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 것 같다. 이번에 보고 내가 왜 봉준호 영화를 좋아하는지 조금 알게됐다. 시작은 사회에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로 보고 있지 않았고 그게 사실 내게는 더욱 개인적으로 폐부에 와닿았고 보고나서 찜찜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른 영화들은 모르겠으나 이 영화가 특히 그랬다. 가장 아니었던 영화는 <괴물>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괴물>을 두 번째 보았을때 이 영화가 정말 슬픈 영화라고 느꼈었다.
부박하고 비루한 삶이 보여지는데 그 안에서 아름다움 따위를 찾을 건 아닐거라고 생각했고 미련한 우악스러움이 나올줄 알았다. 그건 김혜자가 보여주는 자식 눈에는 너무나 별 거 아니고 부끄러운 거 같은 엄마의 모습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마더는 참 똘똘하고 차분하고 강했다. 무엇보다 절망스러울 환경에 대해 거기에 무너지지 않고 삶의 줄을 찾아 당겨나가고 있었다. 난 거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건 내가 내 엄마에 대해 정말 싫다고 느끼는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되는 가끔씩 보여주는 깜짝 놀라게 만드는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어서였다.
마지막에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지만 자신을 무너뜨리게 만든 그런 자식을 버리지 않는 것까지 보면서 나는 역시 엄마가 되는 선택을 하지 않은게 얼마나 잘한 것인가 싶었고 내 엄마에 대해 마음이 아팠다. 엄마의 자식 사랑이 대단한 건 그 사랑을 받고 나고 자라온 존재들에게 드리워진 어떤 끈 같은 것이 자식의 입장에 선 현실에서도 결코 벗어나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지금의 내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면 자식에 대한, 살아온 세월을 믿는 것에 대한 엄마의 고집은 한없이 감정적인 나락으로 치부하려 들지만 실상 자식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이 되어버리는 길인것만 같아 나는 그런 존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없는 인간은 자유를 얻을런지는 몰라도 또한 평생 떠도는 영혼의 외로움을 안은채 언제든 시궁창으로 던져질 인생에 대해 아무런 의지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외롭게 만드는게 엄마라는 존재다. 그러면서 그 감정에 대해 감히 사랑이라고 말하다보면 끈끈함에 질식할 듯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 향하는 감정보다 사랑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다른 끈끈함인 진구의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사실적인데 사실적이지 않아. 안봐야 할 거 같지만 안볼 수 없고 떠날거 같지만 떠나지 않는 존재. 의외로 이런 이상한 존재가 살아갈수록 주위에 많아져 버린다. 삶에 대해 사람의 의지는 어디까지일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한다. 인연이란게 과연 내가 맺고 끊는 다는게 얼마나 될 수 있을까.
원빈은 박카스에 대한 복수를 제대로 한 셈이라 엄마에게 있어 자식이 또 저런 존재겠구나 싶다. 이 영화에서 엄마 없는 캐릭터들은 다 불쌍하다. 죽은 아이와 걜 죽였다고 끝내 누명 쓴 아이. 어쩌면 다시 엄마를 얻어 태어나는게 엄마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갈 것보다 나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게.
마지막에 김혜자가 아들한테 침통을 건네받고 절규하며 버스를 찾아가는 장면이 왠지 어디선가 본 듯 인상적이었다. 나도 내 엄마에게 그런 절규를 하게 했는데 사실 그 순간엔 엄마가 돌아서지 않을까 했는데 버스에 올라 허벅지에 침놓고 춤을 추는 김혜자처럼 내 엄마에게도 그건 그렇게 지나가야 하는 일인 걸 보면서 나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낀 적이 있다. 처음과 끝에 그런 얼굴 표정으로 춤을 출 수 있다는게, 그게 엄마라서 가능한 거 같다. 근데 김혜자가 춤을 너무 그루브있게 잘 춘다. 더 못춰야 했던 건데. 다 안다고 느끼지만 결코 알 수 없고 같이 오래 살 수록 보이고 보여지는게 다가 아닌데 그게 내쪽에서만이 아닌 엄마쪽에서 그렇다고 보여질 때 느껴지는 묘한 기분이 있는데 이 영화는 김혜자를 통해 그걸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