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 입시 이야기
고등학교 미술 입시를 하면서 항상 선생님께서 내주신 과제는 기초디자인(디자인 입시의 한 종류) 구도 아이디어 스케치 5개씩 해오는 것이었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학원에 있는 입시반 생활에서 집을 가면 쉬고 싶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학원 끝나고 집 가는 지하철에서 스케치를 했다. 매번 최선을 다해 5개를 그리지는 않았다. 항상 1-2개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개수 채우는 식으로 하거나 정말 이상한 걸 그려두거나 주제부 위치만 잡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 안 해간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하다 보니 습관이 생겼다.
100번을 반복하면 그게 당신의 무기가 된다.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꾸준함의 힘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표현인 것 같다. 내가 경험해 본 결과, 나는 100번보다 더 오래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의 꾸준함의 비결은 완벽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디어 스케치를 매일 5개를 완벽하게 하는 걸 생각했다면 아마 난 1주일도 못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5개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모두 최상의 퀄리티로 완벽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안 좋은 습관이지만 내가 생각할 때 좋아 보이는 1-2가지가 나오면 그다음부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때 더 몰입해서 양을 늘려야 질이 올라간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그만큼의 끈기가 없었다. 대신 나는 매일의 1-2개로 조금씩 질을 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꾸준하게 아이디어 스케치를 했던 습관이 나의 색을 만들어주는 큰 역할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했는지 기특하지만 (아마 입시의 간절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한번 매일 아이디어스케치 하는 습관이 무기가 되어 지금도 작업할 때 꾸준하게 하는 것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입시할 때 또 하나의 꾸준함은 원장님께서 말해주신 피드백을 모두 적는 것이었다. 미대 디자인 입시의 수업은 아침 9시에 학원 가서 3~4시간 동안 시험을 본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시험 본 것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진다.
학원 한쪽 벽에 제일 잘한 애들부터 못한 애들까지 순서대로 그림이 놓이고 미완성은 가장 하단에 붙여진다. 단두대에 올라가 있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나는 왜 쟤보다 잘하지 못할까, 내 그림을 보며 아쉬운 점에만 초첨을 뒀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그림 실력이 전혀 나아지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원장님이 칭찬하시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지에 대해 초첨을 맞추기 시작했다. 잘 그린 그림이 왜 잘 그린 그림이었는지 코멘트를 적었다. 그리고 나의 그림에 대한 피드백을 적고 그것을 모두 다음 그림에 적용해서 그릴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지씩 적용하며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항상 손에 들고 다녔던 분홍색 노트에 매일 날짜별로 선생님이 주신 피드백들로 가득했다. 아이디어 스케치를 할 때마다 그걸 같이 보면서 어떤 것은 좋았다고 했는지, 어떤 것을 별로라고 하셨는지, 별로라고 하신 것은 하지 않고 좋았다고 하셨던 것은 다시 적용해 보는 등 나만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거다. 좋다고 한대로 그리고, 별로 한대로 그리지 않는 것. 근데 정말 신기하게 아침 9시 시험 시작하면 모든 것을 까먹었다. 단지 잘 그려야 해!라는 부담감에 모든 것을 잊고 허겁지겁 그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전부 다 생각할 수 없으니까 한 개씩 해보자.라는 마음에 처음에는 주제부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그래서 그림의 퀄리티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다음 들었던 피드백은 주제부 완성도가 너무 높다 보니 부주제부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주제부의 에너지를 조금 남겨주고 부주제부에 쏟았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해가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 중에 피드백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그림의 퀄리티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때가 지나고 깨달은 것은 디자인 입시는 재능이 아니라 꾸준함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아이디어 스케치가 엄청나게 특별하고 독창적이지 않았다. 입시를 하면서 물론 기본적인 그림 그리는 스킬도 배우지만 궁극적으로 인내하는 꾸준함을 배웠다.
사실 입시에서 그리는 방법이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마다 원하는 스타일과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학교에 맞지 않아서 받는 피드백이고 기본적인 표현방식(구도, 명암, 투시 등) 대한 피드백이다.
사실 대학에서 과제를 평가받을 때는 주제부의 완성도를 따지지 않는다. 주제 부라는 것 자체의 형태와 의미가 각자의 프로젝트마다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다.
입시를 하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꾸준함으로 자신의 색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디어만 가지고는 자신의 색을 나타낼 수 없었다. 왜냐면 그림 완성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기본적으로 완성해야, 주제부의 투시, 구도, 명암의 정도, 사실적 묘사 등이 받쳐줘야 했다.
물론 우리나라 대학으로 그 사람의 모든 노력을 평가한다는 현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학이 끈기의 하나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엄마가 내가 미술학원에서 그렸던 그림을 사진 찍어 보내줬던 것을 다 모아두고 계셨던 것을 보내주셨다. 입시를 한지 언 9-10년이 지났기 때문에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말 아예 새로 보는 것도 있었다. 예비반(고1-2) 때부터 그렸기 때문에 내가 그린 그림은 기억한다는 것은 아마 불가할 것이다.
근데 딱 기억에 나는 건 피드백받았던 그림이다. 한 마디로 욕먹은 그림은 절대 안 잊힌다.
이 망치를 보자마자
‘망치의 금속 부분은 묘사를 잘했는데 손잡이가 너무 짧다. 투시가 너무 과하게 들어갔다’
라고 하셨던 게 바로 생각이 났다. 안 그래도 종이에 잔뜻 피드백이 적혀있었다.
이걸 보면서 다시 한번 피드백을 적는 것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순간이었다.
완벽할 수 없지만 꾸준하게 할 때, 자신의 컬러를 찾을 수 있다. 각자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