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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Sep 21. 2023

34화 - 라영이를 과소평가했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안녕하세요! 혹시 이 자리가 라영 선배님 자리인가요?”

 라영 선배라니... 2학년으로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라영 선배? 너 1학년이야?”

 “네! 1학년 3반 홍지웅입니다.”

 “라영이 화장실 간 것 같은데 왜? 너 라영이 알아?”

 “아! 그러면 이것 좀 책상 위에 놓고 가겠습니다.”       

   

앳된 얼굴의 후배는 라영이 책상 위에 커다란 장미꽃과 선물 상자를 놓았다.       

    

 “여기 제가 편지를 써둬서 라영 선배님에게 제가 누군지는 말 안 해주셔도 될 것 같아요. 안녕히 계세요. 선배님.”     

 후배는 건방진 말투와는 다르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런데 이 후배 놈은 스케일이 다르다. 얼추 세어 봐도 장미꽃이 10송이는 되는 것 같다. 가격도 상당할 것 같은데 후배 주제에 이런 걸 사 오다니.          

 

 그렇게 후배가 사라지고 수업 종이 막 치고 있을 때 라영이가 돌아왔다. 라영이는 후배가 남기고 간 장미꽃과 선물을 서둘러 사물함에 넣고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장미꽃이 사물함 안에 들어갈 크기는 되나 보다. 안 그랬으면 그 부담스러운 걸 계속 자리에 둬야 했을 텐데...         

 

 이때 라영이의 행동이 참 자연스러웠다는 걸 알았다면 그날 하루의 마지막이 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3교시 쉬는 시간. 아까 매점에서 이온음료를 마신 탓인지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지만 참기로 했다. 소변보다 라영이를 감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까 얼굴을 비췄던 1반 민재가 다시 왔다. 교실을 둘러보더니 민재는 내 자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라영아. 내 마음은 그대로야. 내 꽃 받아줄래?”

 헐... 이런 말을 교실 한가운데서 한다고? 그것도 내 옆에서? 민재는 축구는 더럽게 못하는데 고백에는 엄청 적극적이다.     


 “미안해 민재야. 내 마음도 그대로야. 꽃은 못 받을 것 같아.”

 “그래도 꽃은 받아줘. 놓고 간다. 난 아직 포기 안 했어.”  

         

 손발이 심하게 오그라드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둘은 주고받았고, 민재는 떠났다. 장미꽃 한 송이만을 덩그러니 라영이 책상 위에 놓고. 아까 후배의 꽃다발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꽃이지만.     


 그렇게 민재가 가고 난 뒤 1분이나 지났을까...     


 “너 라영이 맞지? 누가 이 꽃 너한테 전해달라고 해서. 여기 편지도 있는데 꼭 읽어 달래.”

 누군가가 순식간에 꽃과 편지를 라영이에게 주고 갔다. 라영이는 조그만 장미꽃 2송이와 편지를 책상 서랍 속에 넣었다.             


 화장실을 안 가기를 잘한 것 같다. 이 짧은 쉬는 시간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다니.  

    

 “편지 안 읽어봐?”

 “아. 그냥 나중에.”          


 라영이는 눈웃음과 함께 4교시 수업을 준비했다. 꾹꾹 눌러둔 소변이 자꾸 튀어나오려고 해서 4교시 수업은 땀과 함께 들었다.         

      

 오전은 리허설에 불과했다. 우리 학교 남자 놈들은 점심시간에 다들 밖에 나가 꽃이라도 사 온 것만 같았다. 하교할 때까지 라영이는 장미꽃을 10송이는 더 받은 것 같다. 얼핏 봤던 라영이 사물함에는 책 대신 꽃이 가득했다. 은아 사물함까지 빌려서 꽃을 넣어둔 것 같았다. 무슨 연기대상에서 대상 받은 것도 아닌데 꽃을 저렇게 많이 받다니... 저 많은 꽃을 집에 가져가는 것으로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쓸데없는 걱정마저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예인 팬레터 같은 걸로 생각했다. 어차피 라영이의 남자친구는 나라고, 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고백 아닌 고백을 했고 거절당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날마다 라영이 옆에 앉아 있는 짝꿍이니까.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라영이를 과소평가했다. 나를 과대평가했고. 내 얼굴, 내 능력 정도면 라영이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평범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는 하루다.     


 축제 때 보여줬던 라영이의 활약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나를 포함해 우리 2학년은 그 무대를 라이브로 봤으니 당연히 라영이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가 그 무대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고 그 영상의 존재는 소문을 타고 전교에 퍼졌다.      

    

 웬만한 아이돌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춤 실력과 압도적인 음색, 거기에 비주얼까지 갖춘 라영이는 축제 이후로 전교 스타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나도 꽃을 받았다. 보통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로즈데이는 발렌타인데이와 다르게 성별과 상관없이 꽃을 줄 수 있으니까. 5반 은영이와 3학년 김현정이라는 처음 보는 선배, 2반 선아까지 총 3송이를 받았다. 당연히 우리 반에서는 남자 1등이라고 생각했지만 정혁이를 넘을 수 있을지는 확인해 봐야겠다. 하지만 이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받은 독보적 1등이 내 바로 옆에 있는데. 그리고 나는 그 애를 좋아하는데...       

  

 길었던 수업이 끝났다. 하지만 이대로 하루마저 끝내면 안 될 것 같았다. 학원 수업을 째는 건 슬프지만, 다시 공부를 해서 반 1등을 하겠다는 내 굳은 의지를 잠깐 넣어두기로 했다.    


 서둘러 집에 들러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교복을 입고 저녁 시간에 꽃을 사러 다니는 건 뭔가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다. 다행히 엄마는 집에 없었다.        

       

 학교 가까이에 있는 꽃집부터 갔다. 하지만 장미꽃은 품절이었다. 한 군데, 두 군데, 세 군데... 학교 근처 꽃집은 모두 가봤지만 장미꽃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서랑고 학생이야? 이 근처 꽃집에는 아마 장미꽃 없을 거야. 서랑고 애들이 어찌나 많이 사가던지.”

 세 번째 꽃집 주인은 내가 더 이상 헛수고하지 않도록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또 꽃집이 어디에 있었더라...          


 늘 한 발 늦게 무언가를 하려는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짝꿍 정할 때도 내 마음 결정 못하고 겨우 라영이 옆에 앉았다. 나는 왜 늘 우유부단한 걸까...       


 그래서 이제라도 다시 돌려놓고 싶었다. 늦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라영이가 받았던 그 많은 꽃들보다 내 꽃이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다르게 한참을 걸어도 꽃집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가끔씩 있던 꽃집에도 장미꽃은 없었거나 문을 닫았다.        


 허탈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마냥 걸었다. 어디까지 걸었을까... 조금 낯선 동네까지 온 것 같다.   

        

 저 길 너머에 불 켜진 꽃집이 하나 보인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더 걸을 힘도 없다.         


 단정한 간판 아래 우아하게 꾸며진 문을 열고 꽃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 혹시... 장미꽃 있을까요?”

 “어서 와요 학생. 장미꽃은 다 팔렸는데 어떡하죠.”

 “아... 여기도 없군요. 어쩔 수 없죠. 제가 너무 늦게 왔나 봐요.”

 “다른 꽃집 많이 들렀다 왔나 봐요. 에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네.”


 꽃집 아주머니는 진심을 담은 듯한 걱정을 해주셨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지만 그래도 지친 내게 잠깐 위로가 됐다.      

 힘없이 돌아서려는 내게 아주머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학생! 혹시 이거라도 괜찮으면 만들어 줄까요?”

 꽃집 아주머니가 보여주신 장미꽃은 꽃잎이 살짝 찢겨 있었다. 꽃잎의 개수가 조금 부족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빨강을 가득 담은 꽃빛만은 살아 있었다.       

   

 “여기 상처만 부분만 살짝 떼어내면 최상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을 거예요. 대신 제가 예쁘게 포장해 줄게요. 이 아이가 꽃잎은 좀 부족해도 포장지로 잘 감싸주면 생각보다 괜찮거든요. 딱해 보여서 뭘 해주고 싶은데 지금은 이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네!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차피 다른 꽃집에 가도 장미꽃이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리고 많이 지치기도 했다. 꽃집 아주머니의 표정을 봤을 때 그래도 꽤 예쁜 꽃을 만들어주실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아주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날 것인 장미꽃을 다듬기 시작하셨다. 꽃은 순식간에 사랑스러운 모양으로 바뀌었고, 아주머니는 그걸 예쁘게 포장하기 시작하셨다.  


 “여자친구가 장미꽃을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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