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두 여자의 앞에 커다란 벽이 생겨버렸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다음 날, 라영이는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평소 같은 듯 평소 같지 않은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눈치 빠른 나라는 이미 라영이에게 가서 말을 걸고 있었다.
“라영아! 너 오늘 뭔가 느낌이 다른데? 어디 보자. 뭘 바꾸셨을까?”
라영이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라는 그런 라영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박수를 탁 쳤다.
“대박! 너 눈썹이 달라졌는데? 어제 뭐 했어?”
나라는 교실이 떠나갈 듯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와! 근데 진짜 더 예뻐졌어. 자연스럽게 예쁘다! 규아야! 빨리 이리 와봐!”
나라가 부른 건 규아 뿐이었지만, 규아를 포함한 4명의 여자 애들이 라영이를 둘러쌌다. 덕분에 라영이를 몰래 보고 있던 나는 애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서 라영이를 볼 수 없게 됐지만.
“나 진짜 더 괜찮아졌어?”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눈썹 하나 바꿨다고 이렇게 인상이 바뀌나? 근데 어디서 한 거야? 나도 그 가게에 가서 해야겠어.”
나라보다 더 신이 난 규아는 라영이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나 어제 XM 갔었거든. 승필이랑.”
“대박! 김라영 미쳤네 미쳤어. XM에 갔다고?! 승필이랑 벌써 그 정도 사이야?”
나라의 눈은 커질 대로 커졌다. 승필이도, 라영이도 XM에 간다는 소식을 주변에 알리진 않았나 보다. 나라도 몰랐던 걸 보면.
“그런 건 아니고. 승필이가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근데 거기 어떤 매니저님이 추천해 주셔서 어제 시술까지 받고 왔어.”
“헐! 그럼 XM 전용 병원에서 하고 온 거야? 뭐야! 그럼 XM에서 너 픽 한 건가?”
“매니저님이 일단 눈썹 한 번 손보고 다시 만나자고 하시더라고.”
“진짜? 대박! 미쳤다 미쳤어! 너도 XM 들어가는 거야?”
이야기는 길어지고 애들의 목소리는 커져 갔고, 더 많은 여자애들이 라영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직 오디션 보라고 한 것까지는 아니고. 일단 오늘 다시 와보라고 했어.”
“승필이랑 짝꿍 하더니 XM에 입성한다고? 이건 진짜 말이 안 된다.”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근데 너네도 축제 때 봤잖아. 라영이가 춤이랑 노래는 되는 거. 솔직히 춤은 모르겠지만 노래 라이브로는 웬만한 아이돌 다 바르지.”
“라영이 노래는 솔직히 인정이지. 노래로 비교할 거면 가창력 되는 가수들이랑 비교해야지. 아이돌 말고.”
“춤선도 괜찮아서 조금만 연습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럼 우리 반에서만 아이돌 2명 탄생하는 건가?”
라영이는 어제 XM에 처음 방문했고, 눈썹 한 번 시술받았을 뿐인데... 애들은 이미 라영이의 아이돌 데뷔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닌데...”
라영이의 조용한 목소리는 애들의 웅성거림에 묻혀버렸다.
“A-yo! 프렌즈! 근데 왜 여기 다 모여 있어?”
그놈이 왔다.
“라버트! 라영이도 XM에서 데뷔하는 거야?”
“데뷔? 하하하하!”
그놈은 라영이가 무안할 정도로 크게 웃었다.
“뭐 날마다 테스트해야지. 오디션도 봐야 하고.”
“그래도 어쨌거나 가능성이 있으니까 라영이 테스트하고 있는 거잖아.”
“Of course. 그래서 내가 라영이 my company에 데려갔지. Check 하려고.”
“오! 라영이가 만약 데뷔하면 완전 라버트 덕이네!”
으스대며 건방을 떠는 태도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영! 옷도 가져왔지? 오늘부터 actual battle이야!”
“actual battle? 이게 뭔 말이냐 유준아?”
“실전이라고. 실전.”
어느새 영만이놈도 다 듣고 있었나 보다. 아니, 영만이 뿐만 아니라 우리 반 모든 애들이 다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심인가 보다. 라영이는 승필이 안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홀라당 넘어가는 거지... XM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물론 XM이라는 기획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기획사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 기획사 아이돌로 활동할 수만 있다면 그건 사실상 인기를 어느 정도 확보한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아이돌이 되겠다고 하는 애들이 한둘이겠는가... 심지어 승필이는 미국에서까지 날아왔다.
라영이가 축제 때 보여준 노래와 춤은 충분히 훌륭했다. 나 역시 넋이 나간채로 봤으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아이돌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라영이를 좋아하는 내가 봐도 그건 정말 아닌 것 같다. 라영이가 승필이라는 사기꾼에 속아 넘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라영이는 오늘도 승필이와 함께 교실을 나갔다. 심지어 조퇴까지 하고. 그 맛있는 급식마저 먹지 않고 말이다.
“진짜 라영이가 가능성이 있어 보여?”
난 항상 같이 점심을 먹는 정혁이 대신 규아 앞에 앉았다. 규아는 속칭 빠순이라 불리는 아이돌 광팬으로 한밤에 택시를 타고 아이돌을 따라나선 적도 수없이 많다. 그중에 몇 번은 부모님한테 걸려서 집에서도 쫓겨나고 학교에서도 쫓겨날 뻔했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지만 규아 말로는 이건 마약보다 더 심한 중독이라고 했다. 그 아이돌이 멸망하거나 아니면 그 아이돌을 뛰어넘는 새로운 아이돌이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끊을 수 없다고.
“장유준!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
“아이돌이 돼야 의미가 있지. 그거 오디션 보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진짜 넌 너무 모른다. XM 같은 회사에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라고. 네가 만약 하버드 입시 시험 볼 기회를 얻었다고 해봐. 합격을 못하더라도 엄청난 일 아냐? 하버드 시험을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완벽히 이해는 안 되지만 조금 이해는 됐다. 아이돌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금 규아의 눈빛은 세상 어느 눈빛보다도 빛난다.
“지금 우리나라 아이돌은 하버드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고. 우리나라 가수가 빌보드 1위를 하는 게 현실이라니까. 그냥 1위도 아니고 전 세계 1위! 빌보드 1위는 하버드에서 수석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거라고. 알기나 해?”
규아는 입에 있던 밥풀이 내 반찬에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열변을 토했다. 어차피 오늘 밥맛도 없는데... 그래도 소시지볶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인데... 하필 규아의 밥풀은 정확히 내 소시지 위로 올라갔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 내일은 라영이랑 꼭 사진을 찍어야겠어. 이런 게 나중에 다 살이 되고 돈이 된다고! 야! 근데 너 소시지볶음 안 먹을 거야? 그럼 나 먹는다!”
규아는 소시지 위에 살포시 앉아 있던 밥풀까지 한 입에 털어 넣었다.
***
다음 날 교실은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미쳤다! 미쳤어!! 김라영이 오디션에 나간다고? 프로쥬스 010에?”
‘프로쥬스 010... 그건 또 뭐야...’
학교를 다니면서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았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승필이의 등장과 라영이의 오디션은 교실을 너무 어려운 곳으로 만들었다. 무슨 말인지 아예 몰라서 그럴 때마다 규아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영만이가 나한테 맨날 영어 단어를 물어보듯이.
라영이와 나 사이에 갑자기 큰 벽이 처진 기분이었다.
나와 가장 가깝고 내가 마음을 두었던 두 여자의 앞에 모두 커다란 벽이 생겨버렸다.
***
아이돌은 아이돌이고, 이제 1학기의 가장 중요한 시간이 남아 있다. 바로 기말고사다.
기말고사는 중간고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중간고사는 4월에 보고, 기말고사는 6월에 본다. 중간고사를 설사 망쳤더라도 두 달 뒤에 기말고사에서 만회할 수 있다. 하지만 기말고사를 망치면 2학기 중간고사가 있는 10월까지 기다려야 성적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심지어 여름방학도 끼어 있다. 안 좋은 기말고사 성적표로 여름방학 내내 엄마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기말고사는 내게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