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닭 쫓던 고양이는 달라진 그녀를 보았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길었던 자습 시간이 끝났다. 담임이 폰을 나눠주고 빨리 가라고 했다. 서둘러 가방을 멘 미래는 곧장 교실을 나갔다. 전학생 놈은 종소리도 못 들었는지 여전히 자고 있었고, 라영이는 폰을 보고 있었다.
“저기... 라영아.”
“유준아, 미안한데 나 지금 중요하게 연락할 것이 있어서 내일 이야기하자. 미안.”
오늘은 정말 슬프고 열받는 날이다.
***
“A-yo!”
짝꿍이 정해진 다음 날, 전학생은 지각한 주제에 신이 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아, 물론 나한테 한 건 아니고 라영이한테. 난 전학생 앞자리에 앉아 있으니 매우 잘 들렸을 뿐이고.
“라영! 이따 슈퍼마켓 go?”
학교에서 매점을 슈퍼마켓으로 부르는 놈은 처음 본다.
“아니. 괜찮아.”
라영이가 대답하면서 눈웃음을 지었을지 아니었을지 매우 궁금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수는 없다.
전학생이 라영이 옆에 앉았다는 건 이미 전교에 소문이 퍼졌다. 로즈데이에 장미꽃을 30송이 이상 받은 라영이 옆에 전학 온 지 고작 며칠 된 전학생이 앉았다. 그것도 금발 머리에 아이돌을 준비하고 있는 놈이.
“전학생이 라영이 찍었나 봐. 어떻게 오자마자 라영이 옆에 앉을 생각을 하지?”
전학생이 라영이 옆에 앉은 날, 나라는 하굣길에 호들갑을 떨었다.
“그냥 생각이 없었나 보지.”
나라의 호들갑에 난 매우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라가 나한테 물어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맞다! 장유준!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눈앞에서 라영이 빼앗겼네?”
나라는 날 위로해 주는 건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근데 솔직히 전학생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여자 다 사귈 수 있는 거 아냐?”
나라 옆에 있던 규아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떠들어댔다.
“아니지. 아이돌 연습하러 가면 거기에 얼마나 또 예쁜 애들이 많겠어? 안 그래? 심지어 기획사도 XM이라면서. 미쳤다 미쳤어. XM이라니.”
“그건 그렇지. 그래도 라영이가 그렇게 꿀리는 외모는 아니잖아? 게다가 라영이는 춤이랑 노래도 좀 하잖아.”
“전학생은 라영이가 축제에서 춤추는 걸 못 봤으니까 그냥 외모만 본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일단 전학생 눈에는 우리 반에서 라영이가 가장 예쁘다는 이야기네.”
“그건 뭐 우리가 원래 알고 있었던 거고.”
“난 살짝 기대했는데 이번에도 실패네.”
“규아야! 정신 차려! 넌 동북바라기였으면서 이렇게 한순간에 마음을 바꾸냐?”
“아니! 누가 전학생이랑 사귄다고 했어? 그냥 이럴 때라도 한 번 1등 해보나 싶었지. 내 외모가 또 어메리칸 스타일일 수도 있잖아!”
나라와 규아와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내가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잊어버린 듯하다.
“근데 전학생이 잘못 한 건 없지. 유준이가 라영이랑 사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전학생 라영이한테 걸어가는 거 봤어? 진짜 모델 같더라. 어쩜 걸음걸이도 그렇게 우아하면서도 박력 있는지. 다리도 엄청 길어서 세 걸음이면 되던데?”
어느새 현정이도 합류했다. 현정이는 이번 달에 병달이와 짝꿍 하는 걸 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모양이다.
“VAR로 보면 반칙일 수도 있겠지만, 전학생이 잘 모르고 그랬겠지. 나라가 설명해 줬어도 아직 한국말이 서투르니깐.”
아닌데... 전학생 본인이 분명 한국말 하는 건 어려워도 알아먹는 건 다 할 수 있다고 그랬는데...
“라영이가 부럽다. 전학생이 사귀자고 하면 라영이가 사귈까?”
“유준이는 닭 쫓던 고양이 신세구만.”
“멍청아! 고양이 아니고 개거든!”
“개나 고양이나 거기서 거기지!”
현정이의 개드립은 어이없었지만, 결국 내가 고양이나 개 신세가 된 건 분명하다.
“나중에 승필이가 기획사 구경 시켜줬으면 좋겠다. 지빈님 한 번 보는 게 내 평생소원이잖아.”
규아는 지빈이라는 아이돌을 신처럼 모시면서 본인의 학용품부터 책상까지 모두 지빈이로 가득 채웠다. 난 예전에 우연히 규아 사물함을 열었다가 제대로 공포 체험을 했다. 온통 지빈이 사진이 가득 한 사물함은 맨 정신으로 볼 수는 없었다.
로즈데이 이후 한동안 평화로웠다. 라영이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날마다 옆자리에 앉아서 공부도 같이 열심히 했다. 라영이가 모르는 수학 문제는 내가 열심히 설명해 줬고 라영이는 눈웃음으로 화답해 줬다.
우리의 목표는 반 1,2등을 하는 것이었다. 앞에 앉아있는 미래와 효석이를 이기고 싶었다. 공부로도, 외모로도 진정 최고의 짝꿍이 되고 싶었다.
한 때 라영이와 미래 사이에서 고민하고 여러 가지 사건들로 마음이 뒤숭숭해서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로즈데이 이후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내 마음은 라영이를 선택했고 확신했으니까. 잡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고 나는 오로지 반 1등, 아니 전교 1등을 되찾아서 라영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승필이... 라버튼가 마버튼가 하는 놈이 오면서 모든 평화는 깨졌다. 평범했던 일상이 정말 행복했다는 걸 승필이라는 놈은 깨닫게 해 줬다.
그래도 얼굴로는 다른 남자들에게 절대 꿀리지 않은 나였는데... 승필이는 외모하나로 우리 반이 아닌 전교를 뒤집어 놓았다.
정혁이만한 큰 키에 금색의 장발 머리. 딱 벌어진 어깨와는 대조적으로 작은 얼굴 속에 진하게 박혀있는 눈, 코, 입까지. 나와 결이 다르지만 승필이가 나만큼 잘생긴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여기까지는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승필이는 라영이 옆에 앉았다. 하고 많은 자리 중에 라영이 옆에. 심지어 부정 출발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더 서운한 건 라영이의 반응이다. 적어도 라영이가 당황스러워하거나 놀랄 줄 알았다. 라영이 옆자리는 당연히 내 자리였으니까.
그런데 웬걸... 라영이는 자연스럽게 승필이를 받아줬다. 심지어 눈웃음까지 지으면서.
전교 1등보다 사랑이 더 어려운 것 같다.
***
“라영! 혹시 오늘 afternoon에 뭐 해? plan 있어?”
영어가 중간중간에 들어가는 승필이의 화법에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아직 1교시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승필이는 라영이에게 작업을, 아니 말을 건다. 라영이의 오후 계획을 왜 아침부터 궁금해하는 건지...
“아니, 특별한 계획은 없어.”
라영이는 승필이에게 선을 긋는 행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사람이 맑은 것일까... 아니면 재고 있는 것일까...
“Oh, good! 나랑 같이 go?”
“응? 어디를?”
“내 company! XM!”
“XM에 같이 가지고? 정말?”
힐끔 쳐다본 라영이는 정말 행복한 눈웃음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와 짝꿍 할 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눈웃음이다. 라영이는 아이돌 같은 것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다. 방금 보여준 라영이의 눈웃음은 진짜였다.
“오케이, Let’s go!”
승필이는 그 말과 함께 잠이 들었다. 1교시 수업이 시작하는 종이 울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미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는지, 다른 애들이 자는 건 안 되지만 승필이가 자는 건 선생님들이 전혀 터치하지 않는다.
승필이는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밀린 잠은 학교에서 보충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코를 골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라영이가 승필이를 깨우곤 했다. 굳이 어깨를 만져가면서까지 말이다.
이렇게 학교를 다닐 거면 굳이 학교를 왜 다니나 싶었지만, 나라의 말에 따르면 나름의 이유가 있단다. 비자 문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유명 아이돌이 되었을 때까지 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학교에서의 불성실한 행실이 나중에 더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나라는 아이돌을 준비하면서 학교에 출석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고 중요한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승필이는 라영이를 데리고 나갔다. 미국식인지 승필이는 라영이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다행히 그건 라영이가 거부했다. 궁금한 마음에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학원에서 중요한 수업이 있는 날이다.
나는 라영이에게 관심이 있지 XM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나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