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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Nov 10. 2023

41화 - 반칙은 모든 걸 바꿔버렸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써놓고 보니 전학생 얼굴이 괜찮긴 하다. 사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더 눈이 가는 건 몸이다. 전학생의 몸은 우리 학교 최강인 정혁이와 견줄 정도니까.     

 

정혁이는 끊임없는 노력 끝에 저 넓은 어깨를 얻었다면 전학생은 태생적으로 넓은 어깨를 얻은 느낌이다.   

  

골격과 라인에 있어서 전학생의 몸은 정혁이의 몸보다 더 자연스럽다.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정혁이는 닭가슴살을 먹으며 체지방 관리까지 해서 몸 구석구석이 날이 서 있는 느낌이라면, 전학생은 커다란 몸체 속에서 약간의 커브가 숨 쉬는 느낌이다.     


정혁이는 본인이 본인 몸을 보는 걸 좋아한다면, 전학생은 타인이 본인 몸을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고.               

전학생이 온 이후로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의 관심 밖이 됐다. 전학생이라는 스타가 오니, 우리는 관객이 됐다.     

전학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애들의 입을 타고 전교에 퍼져갔다. 우리는 학교 규정상 교실에서 폰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MNS(Mouth Network Service)는 폰 못지않은 속도로 빠르게 소식을 전달했다.     


전학생은 장발이었다. 데뷔하게 되면 어떤 콘셉트로 갈지 모른다며 머리를 기른다고 했다. 가뜩이나 금발이라 색깔부터 튀는데 머리까지 기르고 있으니 누가 봐도 미운오리새끼 같다.         

 

 ***               


드디어 HR시간이 됐다. 담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많이 해봐서 다들 잘 알지? 이번 달은 남자들이 자리에 앉고, 여자들이 가는 거다. 아, 근데 전학생은 어떻게 하지? 친구들한테 들었나? 뭐 넌 그냥 앉아있기만 하면 돼.”

“No, I have an opinion!”

"의견이 있답니다!"     


영만이의 통역 욕심은 담임이 있어도 계속된다.     


전학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I want to go! I want to select!”     

쉬운 단어를 매우 천천히 말해줘서 우리 모두는 이해했지만, 담임만은 아닌 듯했다. 담임은 미래에게 간절하게 사인을 보냈다. 영만이가 말을 하고 싶어했지만, select의 뜻이 살짝 헷갈리는지 미래에게 순순히 양보했다.     


“선생님, Robert는 남자가 갔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미래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이 담임에게 통역을 해줬다.   

  

“Robert, 네가 짝꿍 정하고 싶어? 여자들이 너한테 가는 거 말고?”

“Absolutely!”     


같은 영어지만 전학생이 말하면 재수가 없다. 나도 영어 꽤나 하는 편인데 전학생이 온 이후로 영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난 저 놈보다 절대 영어를 더 잘할 수 없으니까. 말하기 싫다. 열받는다.     


"내가 저 단어는 알지. Absulutely는 매우 물론이란 뜻이야."

드디어 확실하게 아는 단어가 나왔는지 굳이 뒤를 돌아 내게 속삭이는 영만이한테 더 열받는다.    

 

“OK!”

담임은 1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오케이를 외쳤다. No를 하게 되면 피곤해질까 봐, 영어 실력이 들통날까 봐 오케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건 룰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까 했지만, 어차피 나와 라영이가 짝꿍이 된다는 결론은 같을 거라서 가만히 있었다. 담임이 내 말을 쉽게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고. 다른 애들도 귀찮은지 아무 말이 없었고.     

결국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이 앉아 있고, 남자들이 가는 걸로 결정됐다.     

여자애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벌써 네번째 하는거라 이젠 다들 익숙하다.     


예상대로 큰 변화는 없다. 미래는 똑같이 센터 맨 앞 자리를 고수했고, 그 뒤에 현선이, 그리고 그 뒤에 라영이가 앉았다.     


라영이가 같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명백하다. 라영이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충분히 마음이 통했고, 라영이는 내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저긴 내 자리다. 아무도 넘볼 수 없고, 굳이 넘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남자들 준비!”     


담임이 출발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출발한 놈이 있었다. 그놈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잠깐 나도 모르게 패션쇼에 왔나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놈의 걸음걸이는 멋있긴 했다.     


아니지.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다른 애들은 모르겠지만 난 라영이를 지켜야 한다. 내 오른발이 움직이려는 순간, 또 한 놈이 나를 앞질러 갔다. 그놈은 본인 앞으로 아무도 못 간다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뛰어갔다. 그 팔이 너무 가늘어서 툭 치면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나를 포함한 다른 남자들은 스타트가 너무 늦었다. 5미터도 안 되는 경주에서 0.1초라도 스타트가 늦으면 역전은 정말 어렵다.     


나는 서둘러 달렸지만 내 앞에는 거대한 벽이 서 있었다. 금색 넝쿨로 치장한 이 벽은 단단하게 매워져 있어서 뚫고 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팔이 가느다란 그놈만은 게처럼 옆으로 몸을 최대한 얇게 만들어서 그 넝쿨을 뚫었다. 하지만 나는 불가능했다.     


가느다란 팔은 맨 앞자리에 앉았고, 금색 넝쿨은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그렇다. 미래의 짝꿍은 효석이가 됐고, 라영이의 짝꿍은 전학생이 됐다.     


내가 만든 룰을 어기고 부정출발한 두 놈에게 매우 열받았지만 일단 난 두 번째 자리라도 앉았다. 현선이 옆이다. 일단 이렇게라도 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내 바로 뒤를 따라온 영만이의 씩씩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지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라영이의 짝꿍 자리를 빼앗겼다. 하필 전학생 그놈에게.     


“Hi, you’re so beautiful.”     

전학생이 라영이에게 던진 첫 말은 저거였다. 저런 허접한 말로 여자들을 꼬시고 다녔나.     


“응, 안녕!”     

라영이는 내 눈치를 살짝 보는 듯했지만,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전학생에게 인사했다. 눈웃음이라니...? 눈웃음은 나한테만 보여주는 거 아니었나..?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억울하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출발 총성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출발하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이건 명백한 부당 출발로 당연히 재경기를 해야 한다.    

 

“선생님!”

라영이의 눈웃음을 보고 나니 더 화가 나서 난 참을 수 없었다.     


“이거 다시 해야죠. 출발하라는 말도 없었는데 먼저 출발하는 건 반칙이죠!”

“뭘 귀찮게 다시 해! 안 그래?”     


담임은 늘 이런 식이다. 귀찮은 건 절대 하지 않는다.     


"안되죠! 이거 제가 만든 룰이고 제 반장 공약이었어요. 이렇게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면 안되죠!"

나는 이렇게 물러날 수 없었다.     

“거 참 귀찮게 하네. 그럼 다수결로 하자. 지금 앉은자리에 불만 있는 놈 손 들어봐. 많으면 다시 할 테니까.”          

담임의 말에 난 번쩍 손을 들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는데... 영만이 혼자 손을 들고 있었다. 승석이를 버리고 짝꿍없이 혼자 앉은 정혁이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반장! 고작 2명인데 꼭 다시 해야겠냐? 그냥 앉자. 어차피 한 달만 앉으면 또 바꿀 텐데.”          

와... 진짜 분노가 차오르지만 내게 동조해주는 사람이 없다. 더 열받는다.     


“기말고사 2주 남았으니까 오늘은 기말고사 대비 자습할 거야. 잡담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공부하기 싫으면 차라리 잠을 자. 떠들어서 공부하는 애들 괜히 방해하지 말고.”     


담임이 떠드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는 잘 알기에 교실은 금방 조용해졌다. 내 뒤에 앉아 있는 놈은 바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이렇게 대놓고 자는 것도 능력이다 능력.     


현선이한테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지난번 효진이 사건을 같이 추리한 이후로 오랜만에 가까이서 현선이를 본다. 현선이는 추리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나랑 정말 대화가 잘 통하지만, 현선이가 라영이와 싸운 이후로는 나는 현선이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을 내가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무슨 소란이 있었냐는듯 내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맹렬히 공부를 시작했다. 편안하고 익숙했던 미래의 뒷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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