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2학년 4반에 오면 4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전학생이 왔다는 소문이 전교에 퍼지는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전교에서 가장 발이 넓은 나라가 전교를 한 바퀴 돌고 왔나 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쉬는 시간이 되면 우리 반 교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승필인가 승팔인가 하는 전학생을 보려고 여자애들이 정말 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라는 교실 문 앞에서 입장 인원에 제한을 뒀다. 우리 반이 무슨 명품 매장도 아니고, 이게 뭔 난리인지.
교실 곳곳에서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는 통에 우리 남자 애들은 더 이상 교실에 있을 수 없었다. 인원을 체크하는 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에게 엄청 눈치를 주기도 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쉬는 시간마다 교실 밖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야! 솔직히 쟤가 그렇게 잘생겼냐?”
“괜찮게 생기긴 했지.”
영만이라는 놈은 공감 능력이라는 것이 부족하다.
“정혁아, 넌 어떻게 생각해?”
내 옆에서 단백질 음료를 마시고 있던 정혁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혁이라는 놈도 공감 능력이라는 것이 부족하군. 내 양팔은 오늘따라 왜 이 모양이람.
오늘도 나라는 전학생 옆에 딱 붙어서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번씩 지각도 하던 나라는 전학생이 온 이후로 그 누구보다 일찍 등교하고 있다. 나라에게 정혁이란 존재는 시원하게 지워진 것 같다.
“그러니까 이번 달에는 남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고, 여자들이 원하는 남자 옆에 가서 앉는 거야. 오케이?”
“That’s wonderful! 나도 이제 파트너 생기는 거네!”
그러고 보니 6월 자리 바꾸기가 내일이다. 이번에는 남자들이 앉아 있고, 여자가 가는 달이다.
4월 짝꿍 정하는 날에는 축구하다 불의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라영이가 내 짝꿍이 되어줬고, 난 행복한 4월 한 달을 보냈다.
5월에는 미래와 라영이 사이에서 살짝 고민했지만, 난 라영이를 택했다. 물론 효석이가 반칙성 플레이로 미래의 옆자리를 먼저 차지하긴 했지만, 내 마음은 원래 라영이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라영이와 두 달 연속 짝꿍을 했다.
로즈데이에 라영이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사귀는 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정식으로 고백을 하지는 않았지만 라영이는 내게 답을 줬다. 아니, 답을 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영이와 사귄다는 생각까지 해보지는 않았다. 여자를 사귄다는 걸 엄마에게 들키면 바로 전학을 가야 할 테니까. 그저 내가 좋아하는 라영이도 내게 마음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우리 마음 이대로 수능 끝날 때까지 유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전학생이 날마다 전교에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녔지만 라영이는 전학생에게도 말 한 번 걸지 않았다. 사실 쳐다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만큼 나에 대한 마음이 확고하기 때문이리라.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짝꿍 정하는 걸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장유준!”
등굣길부터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영만이다.
“라영이가 오늘도 네 옆에 앉는 거냐?”
희한하게 짝꿍 정하는 날이면 영만이와 등굣길에서 자주 마주친다. 보통 내가 더 일찍 등교하니까 평상시에는 그럴 일이 없는데, 짝꿍 정하는 날에는 영만이도 항상 일찍 등교한다.
“그건 갑자기 또 왜 물어봐? 3월이 그리워?”
“아니 전혀. 3월에 라영이랑 짝꿍이긴 했는데 말도 거의 못 해봤다.”
“그럼 누구 앉아줬으면 하는 여자라도 있나 보다?”
“당연하지.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대체 누가 누굴 사랑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영만이는 늘 사랑 중이다. 늘 혼자만의 사랑 중이다.
교실에 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애들이 많이 와 있었다. 짝꿍 정하는 날이라 다들 설렌 건가...
“오늘도 일찍 왔네? 꽃집 들렀다 왔어?”
“응. 오늘 예약된 건이 좀 많아서 조금 일찍 가서 엄마 도와드리고 왔어.”
“잘됐다! 너희 어머니의 성품과 실력이라면 꽃집은 엄청 번창할 거야!”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기는 하지만, 말이라도 고마워!”
라영이는 내게 특유의 눈웃음을 보내줬다.
우리 반에서 나보다 라영이를 잘 아는 남자는 없을 거다. 난 라영이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꽃집도 알고, 어머니와 대화도 했다. 그리고 로즈데이 날 마지막으로 장미꽃도 줬고. 눈맞춤 세계에도 한 번 들어갔다 왔다.
굳이 수련회 때 일이 아니더라도 애들은 내가 라영이의 짝이라는 걸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을 거다. 그래서 오늘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라영이와 미래 사이에서 고민던 시간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라영이가 내 옆에 앉아줄 거라 확신할 수 있으니까.
물론 미래가 내 옆에 앉을 수도 있다. 이번 달은 여자가 선택하는 달이니까. 하지만 미래도 나와 라영이의 관계가 전과 다르게 깊어졌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게다가 미래의 뒤에서 한 달 동안 지켜보니 미래와 효석이는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둘 다 그 누구보다 수업시간에 열심히 들었고, 다른 애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활발하게 활동하기보다는 친한 극소수의 사람과 다니고, 조용히 공부를 하거나 할 일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 효석이는 친한 극소수의 사람도 없는 것 같지만. 효석이가 그나마 우리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미래일 것 같다.
효석이는 가운데 맨 앞자리에 앉을 것이고, 미래는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에 앉을 것이다. 미래는 짝꿍보단 자리를 택하니까.
중간고사에서는 미래가 1등, 효석이가 2등, 내가 3등을 했다.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내가 반 3등까지 밀린 건 충격적이지만, 그래도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내 옆에는 꽃 향기 가득한 라영이가 앉아있으니까. 그리고 6월에도 내 옆에는 꽃 향기가 가득할 거니까.
라영이에게 굳이 내 옆에 앉아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은 충분히 알았을 테니까. 이번 달에 라영이와 함께 정말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가 반 1,2등 자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이번 달에도 짝꿍은 별로 안 바뀔 것 같은 분위기다. 자리도, 짝꿍도 많이 고정되어 간다. 정혁이는 이번에도 승석이와 짝이 될 것 같다. 나라는 이 사실에 늘 불만이 많았지만, 이번 달은 아닐 것도 같다. 전학생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나타나 버렸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우리 반은 인원이 짝수라서 지금까지 짝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학생이 왔다. 이제 홀수다. 누군가 한 명은 짝 없이 혼자 앉아야 한다.
구조상 전학생이 혼자 앉는 것이 맞다. 굴러들어 온 돌은 알아서 구석에 짱 박혀 있어야 한다. 미국 문화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제 전학생도 우리 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로마에 가면 당연히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2학년 4반에 오면 2학년 4반의 법을 따라야 하고.
심지어 전학생은 아이돌 연습인가 뭔가를 해야 해서 오전 수업만 듣고 간다고 했다. 그럴 바에는 혼자 앉는 게 낫다.
전학생의 인기는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했다. 아니, 더 심해졌다. 이제는 3학년 누나들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이가 깡패라고... 누나들은 나라의 카운팅 따위는 무시하고 거침없이 우리 반에 들어와서 전학생 얼굴을 대놓고 보고 갔다. 끝이 없는 수험 생활에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우리 학교에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다나 어쩐다나.
심지어 부적 같은 걸 만들어 온 선배도 있었다. 그 부적에 전학생의 사인을 받아서 그걸 수능 끝날 때까지 몸에 지니고 다닐 거라고 했다.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전학생의 얼굴은 이국적이면서도 묘하게 한국스러움이 남아 있다. 머리는 금발에 눈에는 진한 쌍꺼풀이 있고, 코는 크고 높은 전형적인 서양 남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눈매에서 무언가 미묘하게 서양 남자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다. 한국의 곡선 같은 것이 살짝 보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