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입사할 때는 입사지원서에 수상기록, 자격증 이런 걸 쓰는 항목이 있었어요. 누가 봐도 꽉 채우면 채울수록 합격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항목들이죠. 저는 대학교 와서 노는 것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마땅히 쓸만한 것이 거의 없었죠. 그런데 노는 걸 좋아하다 보니 이걸 이용해서 자격증을 취득해 둔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레크리에이션 자격증이죠. 노는 걸 좋아하고, 나서서 사회 보는 걸 좋아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자격증 하나 만들어두면 좋을 것 같아서 전역 후에 바로 자격증을 땄었거든요.
사실 우리나라 레크리에이션 자격증은 운전면허증처럼 국가 공인 자격증이 아니라서 발급해주는 기관이 상당히 많아요. 저도 그중 한 곳에서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그래서 자격증이라고 말하기 좀 애매한 부분도 있는 건 맞아요. 그래도 이 자격증 덕분에 자기소개서에 아무것도 안 쓰는 것보다는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물론 그것 때문에 취업이 된 건 아니겠지만요.ㅎㅎ
1. 레크리에이션의 추억
고등학교 때부터 행사 사회를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즐거웠고, 마이크가 가진 권력이 달콤했던 것 같아요. 열심히 게임을 준비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별로여서 집에 와서 자책하고 그만할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게임을 준비하고 사회를 볼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뛰고 자꾸 설레더라구요. 그래서 더 준비하고 노력하면서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었어요.
제가 거창하게 행사라고 이름 붙였지만 여기에는 MT, 대학교 해외봉사 같은 것도 다 포함한 겁니다. 사실 정말 공식적인 행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몇 개 되지 않아요. 제가 정식으로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직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 의뢰 자체가 많지 않았죠.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지인을 통해 연락이 돼서 몇 번의 공식적인 행사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했던 많은 행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군대에서 사회 봤던 기억입니다. 장병의 사기 진작을 위한 군내 행사였는데, 운 좋게 제가 사회자로 뽑혔거든요. 노래자랑, 커플게임(일부 장병의 여자친구들이 초대받아서 행사에 참여를 했어요) 등을 진행했었어요.
근데 군대에서 사회를 봤던 건 정말 특별했어요. 먼저, 인원수! 최소 몇 백 명은 모였던 것 같아요. 제가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으로서, 레크리에이션 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닌 그냥 일반인으로서, 정확히 말하면 일개 병사의 신분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회를 볼 기회가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옷을 입었거든요! 물론 고등학교 때 교복 입은 학생들 앞에 섰던 기억도 있지만, 교복과 군복은 느낌이 아예 다르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잘 웃지 않았어요... 군인이 군인을 웃기는 건 참으로 어렵더군요. 물론 이건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크겠죠. 관객들의 첫 웃음이 터지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행사는 처음이었답니다 ㅎㅎ
2. 취업과 함께 사라진 레크리에이션
대학교 졸업 때까지는 간간히 행사 진행을 하면서 레크리에이션을 할 기회들이 있었는데, 직장에 들어오고 나니 정말 그럴 기회가 없더라구요. 제가 레크리에이션 자격증이 있다고는 하나,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 취득했던 것이고 그걸 가지고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없어서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거든요. 직장인이 되니까 대학교 때처럼 MT를 갈 일도 없고, 그냥 조직의 구성원으로 살다 보니 레크리에이션은 점점 잊혀졌죠.
회사에서 기회가 돼서 딱 한 번 워크숍 사회를 본 적이 있었어요. 오랜만이라 설레고 신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회사 사람들 앞이라 그런지 확실히 어렵고 부담되더라구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다 하지 못하고, 관객들을 두루 쳐다봐야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고. 자꾸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면서 진행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제 스스로가 열정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라 회사 일이라고 제 머리는 생각했던 것 같아요.
레크리에이션 대신에 제가 가장 많이 하는 건 결혼식 사회입니다. 감사하게도 절친한 친구들의 결혼식에 제안을 받아 사회를 봐줬던 적이 몇 번 있었네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행사다 보니 부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 소중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는 자리를 제가 더 빛내주고, 더 축하해 줄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게 결혼식 사회를 봤었습니다.
3. 아들을 웃겨라!
육아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레크리에이션 이야기를 참 길게도 했네요. 오랜만에 예전을 추억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어요.ㅎㅎ
요새 쓸 일이 거의 없는 레크리에이션 능력을 아들에게 몽땅 투입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웃겨라'가 제가 날마다 스스로에게 주는 미션입니다. 근데... 진짜 아기를 웃기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울까요? 그 어떤 행사보다 더 어려운 행사를 날마다 집에서 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신생아 때는 아기가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니 어쩌다 우연히 짓는 배냇 웃음이 전부였죠. 그러다 조금 크니까 '쪽쪽', '짹짹'과 같은 의성어에 웃더라구요. 돌이 지난 지금의 아들은 스스로 웃기다 생각하면 열심히 웃는 것 같아요. 근데 자주 웃어주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저것 시도해보지만, 대부분은 허탕입니다. 국민 놀이라 부르는 '까꿍'놀이도 제 아들은 별로 관심을 안 보이더라구요.
어쩌다 웃기는 포인트를 발견하면 뿌듯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몇 번 반복합니다. 다행히 반복할 때마다 웃어줍니다. 그런데... 제가 지겹습니다. 10번씩 반복하는 건 쉽지가 않더라구요. 아빠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챘는지 아들도 어느 순간 반응이 미지근해집니다.
오전에 재밌어했던 걸 오후에 똑같이 하면 대부분 안 웃습니다. 표정, 말투, 목소리톤까지 똑같이 한다고 하는데 아들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또 아들을 웃기기 위해 새로운 걸 찾아보지만 오늘도 성공률이 높지 않습니다.
레크리에이션을 준비할 때 보통 관객 수, 관객 성향, 행사 성격 이런 것들을 고려하거든요. 서로 친밀한 사람들끼리 모인 행사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모인 행사의 레크리에이션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나름 열심히 분석하고 혹시 모를 여유분의 게임까지 넉넉하게 준비해서 대부분 성공적으로 레크리에이션을 했었단 말이죠. 근데 이게 아들한테는 잘 안 되네요. 관객 수는 아들 한 명, 관객 성향은 아들의 성향. 이렇게 레크리에이션 조건들이 대부분 변함이 없는데, 준비한 게 대부분 안 먹힙니다. 어쩔 수 없이 장난감의 힘을 많이 빌려서 아들을 재밌게 해 주는데, 아들이 저보단 장난감을 더 좋아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ㅎㅎ
4. 그대의 '연예인'이 되고 싶다.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 줄게요
연기와 노래 코메디까지 다 해줄게
항상 개인기와 신기한 이벤트 쇼쇼쇼
준비 다 끝났으니 우울한 날엔 말씀하셔셔셔
분위기 띄울땐 댄스 뮤직 한 곡 때리고
무드 잡을 땐 발라드 한 곡 뽑고
싸이의 '연예인'이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입니다. 제가 와이프에게 결혼하자고 하면서 이 노래를 불러줬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레크리에이션 감성이 충만할 때였으니까요. 와이프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도록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그런데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기는 식상해지고, 재밌는 아이템은 고갈되고, 새로운 개인기는 만들어지지 않네요. 육아를 시작하면서 미디어를 볼 시간이 줄어들어서 대중문화 주류에서 멀어지고 있다 보니 레크리에이션 능력치를 업그레이드 할 기회도 부족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정작 저부터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죠. 결혼식 중에서 하객들 웃음이 가장 많은 결혼식이 어떤 결혼식인 줄 아세요? 제 경험상으로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결혼식입니다. 하객으로 온 고등학생들을 보면 정말 잘 웃어요. 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와 사진 찍을 때 보면 억지로 웃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요.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별 거 아닌 것 같은 말에 다들 까르르합니다. 저도 고등학생 때는 분명 그랬겠죠? 근데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조금씩 잃게 되는 거죠. 마냥 웃을 수만 없는 치열한 현실을 직접 마주하게 되니까요.
노홍철 씨의 명언이 있죠.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고 웃어서 행복한 겁니다."
오늘부터라도 더 웃어보려고 노력해야겠어요. 내가 웃고 즐거워야 그 에너지와 기운으로 아들도, 와이프도 웃길 수 있겠죠. 한 때 레크리에이션에 열정을 다 바쳤던 그때를 추억하며 오늘도, 내일도 아들과 와이프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아빠이자 남편이 돼보려고 합니다. 연기와 노래, 코메디까지 다시 준비하러 갑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제가 가진 자격증 중에 '웃음치료사' 자격증도 있었네요... 아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