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의 이해와 오해
‘쿵’.
조용하던 거실에 굉음이 들려옵니다. 느껴지는 진동으로 봤을 때 이건 사람이 내는 소리는 아닌 것 같군요. 최소 코뿔소, 아니 공룡까지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쿵. 쿵쿵. 쿵쿵쿵.’
첫발을 내디딘 공룡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나 봅니다. 먹이라도 발견한 것일까요?
공룡의 발걸음과 함께 공간을 지배하던 짧은 평화는 순식간에 깨졌고, 집 안에는 공포가 가득 찹니다.
'-'
피식자는 숨죽여 기다립니다. 공룡이 잠깐 조용해졌거든요. 이런 평화가 오히려 두렵기도 합니다.
피식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위층의 움직임을 추적해 봅니다.
‘쿵. 쿵. 쿵. 끼익’.
아하! 공룡이 걸음을 멈춘 이유는 이거였습니다. 냉장공에서 반찬을 꺼내고 있었군요!
‘끼익’ 소리는 식탁 의자를 끄는 소리입니다. 저녁이면 항상 두 번씩 나는 소리죠. 물론 공룡이 야식이라도 먹는 날에는 밤 11시에도 이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요.
‘쾅’.
공룡은 이제 밥을 다 먹었으니 방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려나 봅니다.
아랫집인 우리 집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는데도 아직 문이 멀쩡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건축 기술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퉁탕. 우당탕. 우리르 쾅.’
방에 들어가면 조금 조용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금방 산산조각 났습니다. 공룡은 방에서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좁은 방에서 대체 뭘 하면 저런 소리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온갖 소리들이 불규칙적으로 나고 있습니다.
이 소리가 언제 끝날지는 공룡 본인만이 알고 있겠죠. 1시간이 될 수도 있고, 밤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끝을 알 수 없는 불규칙한 소리의 향연에 아랫집인 저는 오늘밤도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죠.
‘카악! 퉤!’
공룡의 치카치카 시간이 왔습니다. 공룡이라 이빨도 크고 양치질도 오래 걸리겠죠? 양치질을 할 때 왜 저런 괴성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공룡이 양치질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는 건 공룡이 걷지 않고 있으니 지금만큼은 ‘쿵쿵쿵’ 소리가 안 날 거라는 건데...
‘퉁퉁퉁퉁’
아하! 제가 새끼 공룡을 까먹었군요. 아빠를 쏙 닮았을 것 같은 새끼 공룡은 발자국 소리도 아빠와 똑 닮았답니다. 새끼 공룡은 잠드는 그 순간까지 달려다닙니다. 새끼인데도 잠은 어찌나 또 늦게 자는지요.
공룡은 친구도, 약속도 잘 없나 봅니다. 매일매일 집에 꼬박꼬박 들어옵니다.
공룡은 잠도 없나 봅니다. 남들은 다 잘 시간에도 열심히 활동을 하거든요.
세상은 조용해지는데 공룡집만 시끄러워집니다.
아, 공룡 아랫집은 우리 집은 훨씬 더 시끄럽구요.
층간소음 가해자를 공룡을 바꿔서 한 번 적어봤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사례로 보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상입니다.
피곤한 퇴근길. 퇴근의 기쁨도 잠시,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또 머리가 아파옵니다.
오늘은 윗집 공룡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집은 편안한 공간이 돼야 하는데... 집은 공포의 공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트여버린 귀는 더 예민해지고, 쉽게 잠들기 어렵습니다.
나라가 전쟁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 어떤 공격이 날아올지 몰라 불안해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도 딱히 해결책이 없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지... 한숨만 나옵니다.
2020~2023년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공단에 접수된 층간소음 민원은 전체 2만 7773건이라고 합니다. 접수된 건만 저 정도인지 실제 피해는 훨씬 많겠죠. 층간소음이 더 이상 소수의 문제가 아닌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층간소음을 겪고 있거나 겪어본 피해자분들,
아직 한 번도 층간소음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층간소음이 궁금하신 분들에게 이 글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층간소음과 관련해 쓰고 싶은 건 정말 많습니다.
그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키워드만 몇 개 정리해 봤습니다.
1. 층간소음 유발자들 : 층간소음 빌런들에게는 공통된 특징들이 있다.
2. 범인은 반드시 윗집이 아니다? : 범인은 반드시 내 근처에 있다. 하지만 때론 반전도 있다.
3. 부탁이냐 복수냐. 그것이 문제로다 : 사실 확실한 해결책은 없다.
4.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 떠나기엔 이 절이 너무 비싸다...
5. 모든 것이 문제다. 너도, 나도, 건설사도 : 너도, 나도, 건설사도 바뀌어야 한다.
6.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 제발, 제발...
사실 예전에 층간소음 관련해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heuriric/69
https://brunch.co.kr/@heuriric/99
그때는 육아를 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코로나 시국에 글을 썼다면,
지금은 제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겪은 층간소음을 바탕으로 층간소음과 관련한 전반적인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사실 위 목차대로 쓰게 될지 제 자신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공룡의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아 새로운 글 포인트가 생길지도 모르거든요. (부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며...)
여기까지 읽었는데 하나도 공감이 안 된다고 하시는 분은 복 받으신 분입니다. 예민하지 않아 소음을 잘 느끼지 못하거나, 좋은 이웃을 만났거나, 좋은 집에 사시는 분입니다.
여기까지 읽었는데 격하게 공감되고, 예전의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고,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은 분은... 애써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글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층간소음 피해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들으며 오히려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나만 이런 것이 아니구나, 나만 유별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답을 찾을 것이라고 적었지만 사실 그 답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지구상에 전쟁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나라는 존재하지 않듯이, 우리 집, 다른 집도 마찬가지 거든요.
다만 그래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봐야죠. 늘 그렇듯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라고 하죠. 층간소음에도 적용됩니다.
PTSD는 사람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하죠.
층간소음도 정확히 적용됩니다. 귀에 가해지는 고문 같은 것이니까요.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고, 일상생활에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거든요.
트라우마도 꽤 강하게 남습니다. 층간소음 전조증상만 느껴도, 예를 들어 '쿵' 소리가 살짝 들린다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는 윗집 사람이 집에 들어가는 소리만 들어도 몸이 불안해지고 극심한 공포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저도 이런 층간소음을 극복해 보려고 많이 노력해 봤지만,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아파트에 계속 사는 한 진정한 극복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핑계 같아 보이겠지만, 글을 쓰려다 층간소음을 못 이기고 밖으로 도망친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나름의 방법을 찾았지만, 그럴 때도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오늘이었다면 그저 감사하게 됩니다. 폭탄은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니까요. 층간소음은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게 되는 겸허함을 만들어 줍니다.
“기억하라. 모든 일의 시작은 근육 단련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읽고 써야 한다.” - 로버트 두고니
새해가 되고 이 말을 지켜보려 했지만, 읽는 건 꽤나 했지만 쓰는 건 쉽지 않네요. 그래도 뭐라도 써보고 올려보고 소통해보려 합니다.
모두 몸과 마음이 편안한 하루 보내시기를 바라며...
다음 글은 '층간소음유발자들'이라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