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벚꽃이다
몇 년 전, 제가 결혼하고 첫 번째 맞이한 봄이었죠. 와이프랑 여의도로 벚꽃을 보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어요. 벚꽃이 절정일 때라 그런지, 주말인데도 버스에 사람이 많더군요. 와이프가 버스에 흔들리지 않게 잘 붙잡고 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었어요.
"유나루? 유나루 히어?"
고개를 돌려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을 봤더니 외국인이었죠. 머리를 열심히 굴렸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저 말뜻을 이해해보려 했죠. 옆에 있는 와이프에게 멋진 남편의 모습을 보여줄 찬스잖아요.
그때 머리를 번뜩 스칩니다. 그래, 우리는 벚꽃 보러 가는 거지!
"아! 여의나루? 플라워? 히어 히어"
그 외국인 친구들은 여의나루에 내리고 싶었던 겁니다. 저랑 목적이 같았던 거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제 스스로를 칭찬하며 와이프를 보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해줬습니다. 매우 쿨한 표정으로!
1. 여의도가 막혔다!
남중, 남고, 군대 시절을 제외하고 벚꽃이 이렇게 감흥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작년은 아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벚꽃 같은 건 구경할 생각조차 못하고 지나갔지만, 올해는 다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여의도가 막혔다고 하더군요. 여의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벚꽃 장소들이 다 막혔다고.
아기가 태어난 지 1년이 지났는데, 이대로 벚꽃 구경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추운 날씨와 코로나 때문에 외출을 제대로 못했는데, 벚꽃마저 놓치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에 외출을 결심합니다.
2. 철저한 준비와 여전한 불안함
아들이 태어난 지 1년이 넘었지만 사실 사람 많은 곳에 한 번도 데리고 나간 적이 없어요. 낯가림도 문제지만, 역시 코로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죠. 얼굴이나 머리에 뭘 쓰는 걸 정말 싫어하는 아들이다 보니 당연히 마스크는 안 쓰려고 해서 선뜻 사람들 많은 곳에 데리고 나가기가 어렵더라구요. 물론 동네 산책 같은 건 유모차에 태워 자주 했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공원을 가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이었죠.
그래서 일단 무조건 평일에 가는 걸로 했어요. 벚꽃을 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냈습니다. 휴가는 이럴 때 써야 가치 있죠. 다음 벚꽃은 1년을 또 기다려야 하잖아요. 1년 뒤에 코로나가 끝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구요. 그리고 휴대용 유모차도 구입했어요. 친한 친구에게 물려받았던 유모차를 쓰다가 어차피 외출을 종종 해야 하니 휴대용을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방풍 커버를 제대로 씌웠습니다. 아들은 벚꽃 내음을 마음껏 맡을 수 없게 돼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마스크를 못 쓰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사실 아들도 아들이지만, 와이프에게 벚꽃 구경을 꼭 시켜주고 싶었어요. 육아 휴직하고 날마다 집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아들이랑 놀아주느라 고생하고 있는 와이프가 오랜만에 바깥공기도 여유롭게 마시고, 지난 벚꽃의 추억도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거든요.
3. 벚꽃은 벚꽃이다.
평일이지만, 제 예상보다 사람이 훨씬 많더군요. 오전에 올 걸이라는 생각이 짧게 스쳐 지나갔어요. 아들 낮잠을 재우고 점심까지 먹고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오후 4시쯤 갔거든요. 벚꽃 구경을 위해서는 아들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벚꽃은 벚꽃이더군요. 제가 방문한 공원은 벚꽃으로 유명한 공원이 아니고, 적당한 수준의 벚꽃이 있는 곳이었는데도... 예뻤어요. 정말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느낌이 나더군요. 한 손은 유모차를 잡고, 한 손은 와이프 손을 잡았어요. 와이프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걷는 게 정말 오랜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파른 오르막길에 진입하면서 와이프 손을 바로 내려놓았어요. 어쩔 수 없이 '남편'보다는 '아빠'가 우선인 시기니까요.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마음껏 먹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원래 소풍의 즐거움 중 하나가 먹는 거잖아요. 도시락, 추러스, 시원한 음료 등등... 사람들로 충분히 붐비고도 남을 날씨였는데 생각보다 매점은 한산했고, 주변을 둘러봐도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코로나가 바꿔버린 또 하나이 풍경이었죠.
4.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니까
저는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딜 가면 꼭 사진을 1장 이상은 남깁니다. 지나고 나면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더라구요.
코로나가 사진 찍는 풍경도 많이 바꿔놓은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마스크를 쓰고 찍는 사람도 있었고, 사진 찍을 때만 마스크를 벗었다가 끝나면 바로 마스크를 쓰는 사람도 있었구요. 다들 타인과 밀접 접촉을 하고 싶지 않으니 오히려 질서 정연하게 사진을 찍게 되더라구요.
저희 가족도 겨우 벚꽃 사이로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어요. 오랜만에 찍는 야외 사진이라 저랑 와이프는 입에 웃음이 한가득이었는데, 아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어요.
"배고픈가? 사진 다 찍고 저기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떡뻥 하나 줘야겠다. 목도 마르겠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건 손이 가는 일도 많고, 신경 쓸 것도 참 많다는 걸 아기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나서야 느낀 하루였네요. 나들이의 성패는 아기의 컨디션에 달려있다는 것도...
5. 봄바람 휘날리며 벚꽃은 흩날리는데
지금이야 결혼도 했고, 아들도 있지만, 한 때는 벚꽃이 외로움일 때도 있었어요. 남중, 남고, 군대의 긴 8년의 세월에도 그랬고, 백수 시절에도, 여자친구가 없었던 그 해에도 그랬죠. 1년에 며칠 반짝하는 저 꽃이 뭐가 저리 좋다고 난리일까 생각도 했었죠.
그런 시절을 지나 저는 이제 가장이 되었어요. 혼자가 아닌, 둘도 아닌, 셋이 벚꽃길을 걸으니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저 가득한 벚꽃처럼 이 행복이 계속 가득했으면 좋겠다, 벚꽃처럼 확 피었다가 사라지지 않고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벚꽃 나들이를 마치고 차로 이동하는데...
이 냄새는..? 이 익숙한 냄새는..? 이번 벚꽃 엔딩은 아들의 거사를 뒤처리하는 것이었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