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육아는 때로 성악설을 지지하게 만듭니다만
문제는 아들이 아니라 나다!
인성과 관련하여 다룬 중학교 1학년 교과서 내용을 한 번 추억해보죠.
인성론이란 사람이 본래 타고난 성품이 정해져 있다는 관점입니다. 크게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로 구분 지어집니다.
먼저 성선설입니다. 맹자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선하다는 학설이죠.
성악설은 반대로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악하다는 순자의 학설이죠.
성무성악설은 고자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의 성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학설입니다.
육아를 하다 보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성선설을 믿었다가 성악설을 믿었다가 왔다 갔다 합니다. 성무성악설은 확실히 아닌 것 같습니다. 14개월 아들과 함께 보내는 하루를 돌아보며 어떤 학설이 맞는지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07:30 기상
주말이라 나른한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아들은 그런 아빠의 희망을 가볍게 날리는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다가옵니다. 다행히 지난밤 잠을 잘 잤는지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네요. 하지만 저는 아직 비몽사몽 합니다. 토요일이면 원 없이 늦잠 자던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20분쯤 지났을까... 아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일어난 지 한참 지났는데 아빠가 계속 그 자리에 누워있기 때문일까요? 답답한 건지, 배가 고픈 건지,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건지... 아직 말을 못 하니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찡찡대기 시작하니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방문을 열어줍니다. 아들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하이톤의 괴성을 지르고 거실로 나아갑니다.
2. 08:00 아침 식사
배가 고팠는지 제가 주는 대로 열심히 맛있게도 먹습니다. 아들 앞에 책을 펼쳐뒀으나 2장 정도 넘기다 책을 던져버립니다. 앞에 아무것도 없으니 식사 시간이 심심한지 여기저기 둘러봅니다. 제가 블럭을 하나 가져다줍니다. 다행히 그 블럭 하나로 상당히 오랫동안 잘 놉니다. 제 눈에는 하나도 재미없어 보이는데 뭐가 그리 신기한지 블럭을 손가락으로 밀었다가, 두드려도 봤다가, 집어서 제 손위에 올려놓고 웃습니다. 밥을 다 먹고 물을 줍니다. 목이 탔는지 물을 금세 다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짜증을 냅니다. 빨리 물을 더 달라는 거겠죠. 아들이 그렇게 물을 많이 먹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넉넉하게 담았을 텐데... 물을 후다닥 채워서 가져다주니 그제야 만족하는 표정입니다.
3. 12:00 낮잠
낮잠을 잘 시간입니다. 잠이 슬슬 오는지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기 시작합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고 소리를 내며 웃지만 뭔가 아침보다 활력이 떨어졌습니다. 낮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라는 거죠.
아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커튼도 치고 잠을 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아들은 고개를 이불에 파묻고 잠을 잘 자세를 취하며 웃습니다. 10초쯤 지났을까... 갑자기 일어나서 소리를 냅니다. 뭐가 그리 아쉬운 걸까요... 오전 내내 충분히 놀았을 텐데, 아직 잠을 자고 싶지 않나 봅니다. 아들이 자야 저도 좀 쉬고, 점심도 먹고 할 텐데 아들은 이런 아빠의 마음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고 잡기 놀이를 해달라는 듯 도망을 갑니다. 지금은 낮잠을 잘 때인데... 그런 아들을 다시 안아 눕힙니다. 그걸 10번쯤 반복 해더니 이제 아들도 조금 지친 듯합니다.
잠이 든 것 같습니다. 아직 쪽쪽이를 떼지 못해서 쪽쪽이를 물고 잠이 들었습니다. 조심스레 쪽쪽이를 빼고 나가려고 하는데... 소리를 지르며 웁니다. 화들짝 놀라 다시 쪽쪽이를 물립니다. 다시 천사 같은 표정으로 잠을 잡니다. 쪽쪽이는 조금 이따 빼는 걸로 하고 일단 저는 방에서 탈출합니다.
4. 14:30 오후 시작
아들 방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를 찾는 맑고 고운 소리. 문을 살포시 열고 확인해보니 아들이 이미 일어나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네요. 저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오늘은 낮잠을 자다가 깨지 않고 2시간 이상 잤으니 매우 훌륭합니다. 덕분에 저도 좀 쉬었네요.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바지를 벗기는데 아들이 협조를 잘 안 해주네요. 지금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을 잠시라도 놓기 싫은가 봅니다. 새 기저귀를 아직 못 채웠지만 아들에게 시간을 줍니다. 억지로 하다가 혹시 또 짜증을 낼까 봐 기회를 엿봅니다.
그런데 순간 어떤 액체를 본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것 같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하는데, 이미 제 손이 느끼고 있습니다. 따뜻한 액체의 감촉을요. 그 찰나의 시간을 못 버티고 아들은 거실 매트에 시원하게 소변을 발사하셨네요. 그냥 아들이 잠깐 짜증을 내더라도 빨리 기저귀를 채웠어야 했나 봅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를 보며 아들은 또 활짝 웃네요. 배출의 쾌감을 표현하는 것인가 봅니다.
5. 18:00 저녁 식사
오늘 저녁 메인 메뉴는 굴비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굴비에서 살을 추려 냅니다. 혹시라도 가시가 있을까 모든 신경을 집중시킵니다. 아들은 굴비를 야금야금 씹어서 먹네요. 짭조름한 것이 맛있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줍니다. 덕분에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가시를 발라냅니다.
심심할까 봐 중간중간 브로콜리와 김을 아들 앞에 놓아줍니다. 놓기가 무섭게 냉큼 집어서 먹네요. 열심히 굴비 살을 추출하고 있는데 아들이 짜증을 냅니다. 왜 빨리 안 주느냐는 표정입니다. 급한 대로 브로콜리를 줍니다. 빨리 밥을 달라는 것 같아서 일단 밥이라도 넣어줍니다. 밥을 안 씹네요. 굴비가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마음이 급하니 자꾸 젓가락에 가시가 들러붙습니다. 겨우 살 덩이리를 건져서 입에 넣어줍니다. 그제야 세상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저녁 식사는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왔습니다. 생선 살을 빨리빨리 뽑아내지 못한 제 잘못인 것만 같습니다.
6. 20:00 취침 준비
잠잘 준비를 시작합니다. 먼저 아들에게 우유를 줍니다. 벌컥벌컥. 어느새 우유는 바닥을 드러냅니다. 우유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아들은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며 짜증을 냅니다. 서둘러서 아들을 안아줍니다. 요새 가장 좋아하는 냉장고를 열어서 보여줍니다. 시원해서 좋은 건지, 그냥 냉장고가 좋은 건지 '오오오'하며 향기로운 목소리를 냅니다.
이제 하루 중에 가장 어려운 순간 중 하나인 양치질 시간입니다. 눕히는 순간 짜증을 낼 걸 알기에 눕히기 전까지 최대한 양치질을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만 사실 고양이 세수보다 더 못한 것 같습니다. 결국 아들을 눕히고 본격적인 양치질을 합니다. 아들은 소리를 지르며 웁니다. 그런데 눈물은 안 나옵니다. 길었던 양치질을 끝내고 다시 아들을 안아서 냉장고 속으로 데리고 갑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맑은 목소리로 환호합니다.
7. 21:00 취침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아들은 이미 졸린 게 확실합니다. 불을 다 끄고 아들과 같이 눕습니다. 아직 암순응이 되지 않아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아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깔 웃습니다. 그 웃음소리에 정말 기분이 좋아져서 저도 같이 따라 웃어봅니다. 제 웃음이 뭐가 그리 웃기는지 또 깔깔깔 웃습니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소화제 같은 웃음에 잠시 행복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도무지 이걸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웃지 않으니 제 옆으로 와서 몸을 비비고 소리를 냅니다. 제가 할 수 없이 억지로 웃습니다. 그게 또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깔 웃습니다. 그렇게 10분간 웃음을 주고받습니다.
한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뒤척이다 아들이 잠이 들었습니다. 세상 곱고 예쁜 얼굴이네요. 잠든 아들의 모습을 보는 건 참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낮에 했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확실한 타이밍을 보고 아들의 입에서 쪽쪽이를 뺐습니다. 완벽한 성공입니다. 좋은 꿈을 꾸며 편안한 잠을 자기를 바라며 조용히 방에서 나오다가 펜스에 발이 걸렸습니다.
'엥엥엥'. 아들이 그 소리에 깼나 봅니다. 서둘러 다시 아들 곁으로 가서 쪽쪽이를 물리고 엉덩이를 토닥여 줍니다. 다행히 금방 다시 잠이 듭니다. 아들이 다시 온전히 잠에 빠져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쪽쪽이를 빼고 방을 나옵니다.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게 사뿐사뿐.
이렇게 아들과 보내는 토요일 하루가 끝나갑니다...
육아에 가끔씩 지치고 힘들 때면 저는 성악설 지지자가 되곤 했습니다. 어쩜 저렇게 아빠를 괴롭힐 수 있나, 아빠 힘든 건 하나도 알아주지 않나 그런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루 일상을 적어놓고 보니 성악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들이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거나, 우는 건 성악설 때문이 아니라 뭔가 제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짜증을 낸 건 제가 게을러서였고, 아침 먹을 때 짜증을 낸 건 제가 물을 조금 담아줬기 때문이었습니다. 낮잠 잘 때 울었던 건 제가 쪽쪽이를 빼는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였고, 기저귀를 바꿀 때 소변을 발사한 것도 제가 타이밍을 못 맞췄기 때문이었죠. 저녁 먹을 때는 제가 미리 가시를 다 제거한 굴비 살을 준비해뒀어야 했는데 제 준비 부족이었고, 양치질을 할 때는 제 스킬이 부족해 아들이 아파서 우는 거겠죠.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제가 지쳐 더 열심히 안 웃어줬고, 펜스에 발이 걸린 건 너무나도 명백한 제 실수네요.
내일 아침이 밝으면 아들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또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다가오겠죠. 피곤하지만 내일은 아들이 짜증을 내기 전에 더 일찍 방문을 열고 아들과 하루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아기의 웃음엔 거짓이 없다는 걸 믿습니다. 전 이제 성악설이 아닌 성선설 지지자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