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연애소설] 다시 찾아온 그녀의 생일

1월 25일

by 휴리릭

친한 친구인 연지의 졸업 연주회가 있던 날, 난 일찍 가서 자리를 잡았다. 대학교 강당에서 하는 거라 특별히 좌석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적당하다 싶은 자리에 앉았다. 한 칸씩 띄어서 앉는 것 같은 느낌이라 나도 오른쪽 한자리를 비우고 앉았다. 내 왼쪽 자리가 끝 좌석이라 여기 앉을까 하다가 어차피 아무도 앉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비워두고 내 목도리를 올려뒀다.


객석에 어둠이 깔리고 공연은 시작됐다. 노래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 내 왼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객석이 어두워 잘 안 보여서 가장 앉기 쉬운 자리를 찾아서 앉은 모양이다. 앉아도 되냐는 그 여자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 올려둔 내 목도리를 치우면서 그 여자를 잠깐 봤다.


연지의 노래를 들으려 왔는데 내 옆에 앉은 이 여자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어두워서 얼굴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닌데 이 여자가 궁금해졌다.


piano-gb03cb070f_1280.png


공연은 끝났고 살포시 기지개를 켰다. 옆에 앉은 여자를 의식하느라 나도 모르게 몸이 긴장했나 보다.


"혹시 연지 친구분이세요? 저녁 식사하러 가시나요?"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객석은 환해졌고, 여자의 주변은 더없이 빛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연을 했던 연지의 옷은 휘황찬란했지만, 검은색 정장을 입은 이 여자의 옷이 더 눈부셨다. 적어도 내 눈에는.


"인사해. 내 고등학교 절친이야."


그렇게 우린 다시 인사를 나눴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려 했지만, 그날 주인공은 연지였고,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도 많아서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원래 낯을 가리지 않는 내 적극적인 성격은 이상하게 그날 따라 내 뒤로 숨어버렸다. 그녀의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1월 25일.


"그때 인사했던 내 절친 기억나? 오늘 그 애 생일인데 같이 축하해주러 갈래?"


친한 친구끼리 알고 지내면 좋지 않냐며 연지는 내게 말했다.


"그래? 근데 어색하지는 않으려나? 내가 가도 되는 자리인가?"


그녀와 다시 말을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이미 파티에 달려갔지만, 그래도 연지 앞에서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뭐 어때? 원래 그런 곳에 가는 거 좋아하잖아? 이따 봐."


몸과 마음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생일 파티까지는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옷을 입지... 아 맞다! 선물. 선물을 사야 한다. 그런데 뭘 사야 하지? 너무 어렵다. 그녀에 대해서 아직 아는 게 하나도 없다. 하루만 일찍 알려줄 것이지... 다급해진 마음에 우선 연지라도 탓하고 싶었지만 즉흥적인 걸 좋아하는 연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다. 그래서 이런 행운도 찾아온 것이고.


선물로 그녀에게 내 첫인상을 심어주는 건데 그 선물을 고르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없었다. 고민 끝에 무난함을 택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대학생 신분에 맞는 선물이 좋을 것 같아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골랐다. 천 원을 더 주고 포장을 했다. 바쁜 점원이 대충 포장하는 것 같아 내 손으로 꼼꼼하게 다시 포장지를 정돈했다. 그 안에 내가 쓴 조그만 생일 축하 카드도 넣었다. 처음이니까 거창한 것보단 정성 가득한 것이 좋겠지.


a-book-gc8f8ad7e0_1920.jpg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던 생일 파티는 즐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끼어들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연지 옆에 앉아서 한 번씩 그녀를 훔쳐보는 것이 전부였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녀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내 친구들 중에 가장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연지도 그 파티에서는 평범해 보일 정도였다.


친구들이 그녀에게 건네주는 선물들은 그들의 겉모습만큼이나 화려했다. 명품 브랜드에 관심 없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브랜드의 제품들이 하나씩 그녀 앞에 놓였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책을 넣느라 어쩔 수 없이 들고 나온 내 백팩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나는 급하게 오느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했다.


그 뒤로 가끔 그녀를 만났다. 물론 모두 연지가 즉흥적으로 불러서 같이 만난 것이었다. 연지가 부를 때마다 난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고민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초라한 건 아닌지 거울을 다시 한번 보고 망설였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그녀가 가득했기에 연지가 부르면 한 번도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싼 음식을 먹으며 그들만의 대화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씁쓸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그녀에게 반해있었지만, 그 생일 파티 이후로 난 자신이 없어졌다. 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다시 새로운 1월 25일이 코앞이다.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년 동안 우리 사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녀와 단둘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함께 보낸 시간과 추억이 생겼다. 서로 말도 편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색함이 있다. 물론 그 어색함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문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나도 모르게 전송 버튼을 눌러버린 것 같다.


"이따 너희 집 근처를 지나갈 것 같은데 시간 되면 잠깐 볼까..?"


메시지가 전송되었다는 문구를 보고 아차 했다. 그녀와 단둘이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너무 과감한 문자를 보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집 근처를 지날 일은 당연히 없다. 게다가 그녀의 집은 주거 지역에 있어서 대학생인 내가 거기를 지나갈 일은 정말 없다. 그녀도 이 사실을 알지 않을까..?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짝사랑은 늘 을이 되는 기분이다.


초조하게 시간은 흘러갔다. 5분쯤 지났을까...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답장이 왔다.


"그러자. 이따 저녁 먹고 8시쯤?"


급하게 준비를 했다. 작년에 주지 못한 생일 선물을 꼭 사주고 싶었다. 백화점에 가서 립스틱을 하나 샀다. 내가 아는 가장 비싼 브랜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립스틱으로 샀다. 더 비싸고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지만, 대학생 신분에서 내 알바비를 탈탈 털어 내 나름 최선을 다한 선물이다. 책보단 립스틱이 더 쓸모가 있겠지 라는 쓸데없는 위로와 함께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lipstick-g444179a0a_1920.jpg


그녀를 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주로 그녀가 말을 많이 했다. 회사 생활부터 가족 이야기까지 주제는 다양했다. 내 이야기를 할 틈은 별로 없었다. 굳이 내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귀에 담고,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느라 바빴으니까.


작년 1월 25일부터 가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내 가슴은 모질게 당했다. 그녀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나보다 한참 더 높이 있다는 생각이 날 힘들게 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내 가슴이 뛴다. 미련하게 또 뛰기 시작한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니까. 처음 본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름다웠으니까.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 앞까지 걸어갔다. 초고층 아파트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내가 살고 있는 원룸을 떠올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그녀가 탄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고 정 없는 엘리베이터는 바로 문을 닫아버린다. 엘리베이터는 한참을 올라가더니 멈춘다. 청각에 내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희미하게나마 도어록을 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흔적을 붙잡고 싶었나 보다. 방금까지도 내 눈앞에 있었던 그녀가 꿈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


elevator-g8808119b2_1920.jpg


그녀를 좋아하는 일이 얼마나 험하고 힘들지 잘 안다. 그리고 그녀를 좋아할 때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도 잘 알고. 하지만 아직 학생이고 가진 게 없는 지금, 그녀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는 건 여전히 자신이 없다.


그래도 오늘 그녀를 만나고 확신했다. 난 그녀를 좋아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좋아한다는 그 말을 가슴에 품고 닫혀 버린 엘리베이터를 보며 다짐한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곧 당당하게 내 마음 보여주겠다고...




1월 25일

(원곡 : 듣고 있나요 song by 이승철)


오랫동안 계절 너머로

추억 뒤로 그대를

지우려 했어요

가슴속에 있던 슬픈 그대를

지워야 내 가슴 숨 쉴 것 같아서


머린 그댈 지운 척해도

잊었다 계속 외쳐도

가슴은 우리 시간을

지워내지 못하고 또 새겨두고 있었죠


1년을 뒤로 걸어서

시간은 계속 흘러서

다시 찾아온 그대 생일

내 가슴은 망설이죠


감사했었죠

1년 전 오늘 하루를

그댈 알게 해 준 우리 인연을

준비해요 다시 뛰는 가슴 붙잡고


볼 수 없던 우리 공백이

우릴 오히려 편하게

걱정이 앞선 내 가슴

그대 마주하고서 어느새 미소 짓네요


여전히 아름답네요

처음 본 그 순간처럼

벌써 내 가슴 달려가요

시킨 적도 없는데도


그대는 모를 일 년의 가슴앓이도

눈앞의 그대를 보고 있음에

고마워요 다시 나를 바라봐줘서


새겨두죠 그대 하나하나를

시간은 그댈 붙잡지 않기에


행복하네요 그대를 좋아한다고

내 가슴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오늘

자꾸 향하는 내 가슴 붙잡을게요

하지만 언젠가 들려줄게요

사랑해요 항상 품고 있던 그 말을


이전 08화[초단편연애소설] 그래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