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연애소설] 내가 뛰는 이유
아름다운 밤
"반가워요! 저는 멘토링 프로그램 조교 강지연입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여러분들의 멘토 생활에 도움을 드릴 테니 열심히 해봐요!"
대학생 멘토들 사이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조교님은 눈에 띄었다. 단지 패션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마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학번이지만 아직 졸업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멘토링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재학생이 멘토가 되어 신입생 멘티를 케어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날 멘토로 맞는 멘티는 내 학번을 듣고 깜짝 놀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면접 때도 이 질문을 받았다.
"학번이 조금 많이 차이 나는데 잘할 수 있겠어요? 신입생들이 너무 어려워하면 어떡하죠?"
"아... 제가 복학생이라 그럴 수 있기는 한데... 그래도 제가 항상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돌 노래도 다 알고 뭐 그런..."
경쟁이 치열해서 면접을 통해 멘토를 선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망설였었다. 굳이 이걸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전공에 스펙관리, 취업준비까지 할 일이 정말 많은 시기였다. 하지만 이대로 대학생활을 그냥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복학해서 너무 못 놀았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지금 즐기지 못하면 젊음이란 건 다시는 내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면접에 합격하고 내게 어려운 질문을 했던 그 면접관을 조교님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 사실 면접 때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면접 보면 취업은 안 되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합격을 했고, 오리엔테이션에 와서 조교님을 봤다.
멘토링 프로그램은 내게 활력소 그 자체였다. 20살의 멘티는 5살이나 많은 나를 정말 잘 따라줬다. 무엇보다 멘토와 멘티가 모두 모여서 함께 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이렇게나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을 이 프로그램이 아니면 어찌 만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우리는 소풍도 가고, 엠티도 갔다. 나는 초고학번이라 과에서 했다면 절대 못 갔을 행사인데 멘토링 프로그램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 말고도 고령의 멘토는 많았으니까. 혼자일 때는 부끄럽지만 여럿이면 떳떳해진다.
조교님은 대부분 조교 사무실에 있었다. 나는 멘토링과 관련해서 조언이 필요하다는 전형적인 이유를 가지고 종종 사무실에 들렸다. 혼자 가기는 조금 부끄러워서 같은 멘토 친구를 데리고 갔다. 연애 경험이 없는 친구라 그런지 내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편했다. 그 친구가 멘토링과 관련해 진심으로 조교님과 상담할 때 나는 한 번씩 몰래 조교님을 훔쳐봤다.
"나 달리기에 소질이 있나 봐. 달리면 뭔가 기분이 좋던데?"
"정말요? 저 마라톤 해요 조교님!!!"
멘토들과 조교님이 함께 한 회식 자리. 조교님은 나와 꽤 거리를 두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내 귀는 조교님 바로 옆에 있었고, 조교님이 달리기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 들리자 나는 큰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달리는 건 내 주특기이자 자부심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학업 성적이 특기이자 자랑이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오니 아무 의미가 없었다. 모두 같은 대학교 학생이니까.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 공부로는 이기기 힘들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자 약간 오기가 생겼다.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내 재능이 달리기였다. 그것도 단거리 말고 장거리. 우연히 친구들과 대운동장에서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다들 한 바퀴도 제대로 못 돌고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몇 바퀴를 달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내가 달리기로는 이 대학교 내에서 상위 1%에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을.
학창 시절에 보았던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시간이 나면 나는 늘 달렸고, 마라톤 대회도 주기적으로 참가했다. 그런데 조교님이 달리기에 흥미를 보이니 내 마음도 덩달아 흥분 상태가 됐다. 난 자연스럽게 자리를 조교님 옆으로 옮겼고, 우리는 달리기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달리는 이유는 운명처럼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미 알코올로 빨개진 내 얼굴은 더 붉어졌다.
멘토링에서는 강지연 조교님이었지만 달리기에 있어서 강지연 조교님은 내 학생이었다. 조교님은 달리기가 정말 좋았는지 내게 많은 것을 물어봤다. <마라톤은 철학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같은 책을 읽었던 나는 조교님의 질문에 뭔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대답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던 책이 먼 훗날 이렇게 도움을 줄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우리 멘토링 프로그램 사람들 데리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보는 건 어때? 뭔가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지 않아?"
어느 날 조교님이 내게 진지하게 제안해왔다. 나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마라톤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글을 멘토링 게시판에 올렸고, 생각보다 뜨거운 반응과 함께 총 10명이 참가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마라톤 역시 훈련과 연습이 기본이다. 자주 뛰면서 본인 능력을 파악하고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 준비 없이 뛸 경우 중도 포기하거나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다. 특히 첫 마라톤 대회일 경우, 완주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달리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한 대회에서 완주를 했다는 사실은 평생 기억에 남을 테니까.
마라톤 대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계속 뛰어왔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마라톤 대회가 처음이다. 내가 이 참가들의 멘토가 돼야 하는 만큼 마음이 급해졌다. 난 그들의 완주를 도와줘야 하는 책임이 있다. 완주를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 없이 깡으로 완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후유증이 너무 크다.
다들 바쁘기 때문에 연습은 일주일에 3일을 잡았다. 대회까지 3주밖에 남지 않았다. 훈련에 모두 참석한다 해도 고작 아홉 번밖에 되지 않는다.
연습 첫째 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예상을 했지만 정말 한 명도 안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페이스대로 연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혹시 연락이 올까 폰에 신경이 쓰여 제대로 연습을 하지 못했다.
연습 둘째 날.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난 원래 달리기 연습할 때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않는다. 특히 폰. 폰을 쥐고 뛰는 건 매우 불편하다. 혹시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매우 신경 쓰이고 손에 땀이 차기 시작하면 찝찝하다. 하지만 오늘도 들고 나왔다. 혹시라도 늦게 참석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봐.
폰을 쥐고 있으니 내 템포대로 뛰진 못하고 러닝 수준의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폰을 쥐고 있는 내 왼손에 찌릿한 진동이 느껴졌다.
"혹시 연습 중? 사람들 많이 왔어? 나 지금 가도 되려나?"
난 달리기를 급하게 멈췄다. 손에 고여 있는 땀을 황급히 바지에 닦았다.
"아무도 안 왔지만 저 대운동장에 있어요! 혹시 오실 건가요..?"
답장을 하고 나니 호흡이 가빠졌다.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원래 달리는 시간을 철저히 즐기자는 것이 내 철학이다. 난 시간이나 거리를 목표로 설정해두고 뛰지 않는다. 이럴 경우 목표를 달성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페이스가 흐트러지거나 초반부터 금방 지칠 수도 있다.
내 곁을 스치는 바람, 주변의 사람들, 하늘에 희미하게 보이는 별...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뛰어야 한다. 그래야 힘들지 않다. 힘든 고민도 달리다 보면 별 것 아닌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은 안 된다. 전혀 집중이 안 된다. 내 신경은 온통 폰을 쥔 왼손과 대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해 있다. 왼손에 진동이 느껴져서는 안 된다. 혹시나 조교님이 마음이 바뀌어 안 온다는 톡일 수도 있으니까. 계단에서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여야 한다. 지금까지 3명의 실루엣이 계단을 내려와 실체가 되었지만 모두 조교님은 아니었다.
대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단위로 돌아야 하는데 직선으로 왕복하고 있다. 한 바퀴를 돌면 계단을 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뛰어야 하니까 안된다.
또 하나의 실루엣이 보인다. 이번에도 아닌가 보다. 톡 받은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달리기에 집중해보자며 다시 고개를 돌린다. 사실 조교님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떻게 달리기를 알려줘야 할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물론 연습 일정을 잡을 때 대강의 연습 프로그램을 짜뒀지만, 그건 단체용이었다. 이렇게 조교님과 단둘이 뛰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근데 왜 못했지..? 상상해봤으면 행복했을 텐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그랬나?
뒤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 이름이 들리자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 전에 봤던 그 실루엣이 내 앞에 와 있었다.
"조교님?! 조교님 맞네요! 언제 오셨어요?"
운동복을 입은 조교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캐주얼하게 입은 조교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보다 2살 많은 조교님이 막 편하지는 않았다. 면접관으로 처음 봐서 그랬을 수도 있고, 조교님은 항상 우리들을 이끄는 리더 같은 느낌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누나라고 불렀으면 조금 나았을 텐데 매번 조교님이라 부른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옷이 사람을 이렇게 바꿀 줄은 몰랐다. 귀여운 운동복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조교님은 오히려 내 후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이 더 그렇게 만들었다.
"나 뛰는 자세 한 번 봐볼래? 어때? 괜찮아?"
조교님은 내게 질문부터 던졌다. 안부도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시작할 줄 알았던 연습은 바로 시작됐다.
몇 가지 달리기에 관한 기본 설명을 하면서 조교님과 나란히 뛰었다. 몇 번 맞장구를 치던 조교님은 숨이 차는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다. 난 조교님 페이스에 맞춰서 뛰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조금 더 해볼까 하다가 멈췄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조교님과 나란히 대운동장을 뛰는 이 순간을.
생각해보니 조교님과 단둘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교 사무실 아니면 멘토링 행사 외에는 조교님을 따로 보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조교님과 단둘이 있다. 그것도 같이 달리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리기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혼자 달렸다. 달리기는 고독하고, 인생은 원래 고독하다는 생각으로 달렸다. 몇 년을 해온 달리기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다른 기분을 느낀다. 날 스치는 바람, 은은한 대운동장의 조명, 멀리 보이는 버스의 불빛까지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런 밤이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그날 이후로 연습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정말 참가에만 의의를 두는 것 같았다. 딱 한 사람, 조교님은 조금 달랐다. 연습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틈틈이 집 근처에서 뛴다며 한 번씩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내 채팅 목록에 조교님이 생겼다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막연했던 감정은 서서히, 아니 급격하게 선명한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드디어 대회 당일. 총 9명이 모였다. 한 명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남자들은 10km, 여자들은 5km 코스에 신청했다. 특별한 연습이 없어도 기본적인 체력과 건강이 있다면 어떻게든 완주는 할 수 있는 코스다.
나는 하프코스로 신청했다. 다른 남자들보다 2배 이상을 뛰어야 하지만, 도착하는 시간은 차이가 많이 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하프코스는 10km 코스보다 10분, 5km 코스보다 20분 일찍 출발한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뛰는 것이 나의 마라톤 철학이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목에 무언가를 걸었다.
마라톤은 출발하고 나서 생각보다 일찍 후회가 몰려올 수 있다. 내가 이걸 왜 한 거지? 이 힘든 걸 왜 돈까지 내면서 한 거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5분만 뛰고 있으면 이미 숨이 많이 차오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나는 왜 뛰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뛰어야 한다. 그냥 즐거워서 라는 단순한 답을 가지고 1시간을 넘게 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마라톤이 시작된 것도 승전보를 전하기 위한 궁극의 목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왜 뛰는가'에 대한 내 대답은 매번 달랐었다. 오늘의 대답은 내 목에 걸려 있는 이것이다. 조교님을 생각하며 쓴 노래 가사를 출력해서 목에 걸었다. 그리고 우연히 얻은 조교님의 사진도 조심스레 넣었다.
그날 밤 행복했던 그 시간을 떠올린다면 1시간 반 정도는 금방 지나갈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조교님이 날 지켜볼 텐데 완주를 못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초반 오버페이스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드디어 희미하게 결승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별로 힘들지 않다. 그저 관성에 내 몸을 맡기도 나는 계속 달리면 된다.
피니쉬 라인에 서 있는 꽤 많은 사람들 중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조교님도 무사히 완주를 했나 보다.
난 마지막 스퍼트를 한다.
내 진심은 완주로 전했다.
아름다운 밤
(원곡 :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Song by 토이)
어둠이 깔리고 별은 깨어나고
구름은 노을 품어 살짝 붉어진
아름다운 한 여름의 밤
눈앞의 그대는 늘 눈부시네요
옷을 갈아입은 그댄 오늘따라
더 순수해 보여
내 기분 그대는 아실는지요
그대 옆에 함께 서서 숨 쉬는 기분
별들도 노을품은 구름도
스치는 이 바람도 모두 아름답네요
떠올려봐요 우리 추억을
함께 했던 시간
같이 웃던 그 행복을
달려요
그대 옆에 나란히
오늘 밤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밤
가슴은 알았죠 처음 순간부터
머리로 애써 선을 긋고 있었죠
가슴 뛰지 않게
그대를 지우고 계속 지웠죠
놓지 않으려는 가슴 달래가면서
그댄 저 높은 곳에 있기에
사랑해선 안 되는
그대를 잘 알기에
하늘을 보며 달리는 지금
모든 걸 다 잊고
이 행복에 취해 있죠
알아요
나는 아니라는 걸
허나 그대 미소 나를 뛰게 하는 걸
기도합니다 저 별들 보며
아름다운 미소
계속 보게 해달라고
이렇게 함께 뛰는 행복을
아주 조금만 더 간직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