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리고 오늘
"인원 확인 완료. 15명 모두 비행기 탑승하러 가시죠!"
드디어 떠나는구나. 내 생애 첫 해외로 가는 비행기다.
대학교에서 모집하는 해외봉사단에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해외여행으로 비행기를 탔으면 더 좋았겠지만, 내 형편에 해외여행은 사치다. 그래도 다행히 운 좋게 봉사단에 합격해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장시간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인터넷 보고 나름 이것저것 많이 준비한다고 했는데, 처음이라 분명 뭔가 빠진 것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친구가 여권하고 비행기표만 잘 챙기면 출국은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친구를 한 번 믿어봐야지.
"어, 오빠 물은 못 가지고 들어가요."
나보다 5살이나 어린 미진이가 내 가방 속에 있는 생수병을 봤나 보다. 나이는 어려도 나보다 비행기는 훨씬 많이 타봤겠지. 친구는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날 소주 한 병 더 먹겠다는 걸 내가 말렸다고 그런 건가. 그래도 처음인 거 티 나지 않게 유연하게 대처해야겠다.
"어? 이걸 내가 언제 넣어뒀지? 맞아 맞아 물은 못 가지고 들어가지 하하하"
위기는 넘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미진이는 내가 뭔가 불안했나 보다. 결국 내 가방 속에서 로션도 꺼냈다.
"오빠 이렇게 큰 로션도 반입 금지라서 아깝지만 버리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화장품 샘플 챙겼으니까 그거 줄 테니 발라요. 오빠는 피부 좋아서 안 발라도 될 것 같지만요"
미진이가 내 여행 가이드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마지막에 진심인지 빈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까지 듣고 나니 더 그랬다. 여행을 제대로 가본 적도 없어서 가이드가 정확히 무슨 일 하는 지도 잘 모르지만 뭔가 가이드는 이런 걸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진심 같은 빈말인 칭찬 뭐 그런 거. 본심은 상관없다. 그래도 기분이 좋으니까.
드디어 비행기 탑승. 마침 미진이가 내 옆자리다.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잘 됐다. 미진이에게 창가 자리를 쿨하게 양보했다. 공개적으로 망신당할 뻔한 걸 도와준 값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싼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미진이가 정말 좋아하는 걸 보니 훌륭한 거래를 한 것 같다.
창가 자리를 좋아하는 것도 잠시, 미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난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제주도 갈 때 비행기 탄 이후로 처음 타는 비행기라 그런지, 무려 몇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떨림과 긴장이 날 지배해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았다. 미진이 옆에 있는 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미진이를 바라봤다.
그곳 아이들과 함께 한 10일은 정말 행복했다. 첫 해외 방문이지만 난 그 누구보다 현지 음식을 잘 먹었고, 그 누구보다 잠을 적게 잤지만 체력은 거뜬했다. 그곳 음식이 안 맞아서 힘들어하는 미진이에게 난 내 것을 아낌없이 줬다. 비행기에서 가져온 고추장부터 내 몫의 컵라면까지. 공항에서 빚진 건 이미 충분히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주고 싶었다.
이곳에서 보낸 열흘 동안 나를 포함한 15명의 봉사단원들이 정말 많이 친해졌다. 나이도, 전공도 다 달라서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같이 고생하고 봉사하다 보니 어느새 대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나는 뭘 준비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었다. 나는 미술이나 음악 같은 것에 재능이 없어서 이런 걸로 봉사활동에 큰 도움이 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재밌는 이야기들을 가득 모았다. 그곳에 가면 인터넷도 안 되고 심심할 테니까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특히 미진이가 내 이야기에 정말 많이 웃었다. 미진이와 나이 차이는 있어도 개그코드는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같이 웃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나는 늘 미진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밥을 먹을 때도, 버스를 탈 때도, 게임을 할 때도.
그곳에서의 마지막 날. 유난히 별이 환하게 떠 있는 밤이었다. 나랑 미진이는 숙소 앞을 산책하게 되었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뭔가가 이뤄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우리 곁에 가득했고, 나와 미진이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이게 행복일까..? 가난하고 힘들었던 내 삶에 머리 위의 별처럼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미진이가 준 마지막 화장품 샘플을 발랐고, 그렇게 봉사 마지막 날 밤은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 써버린 화장품 샘플처럼 그 빛은 한국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미진이와 생각보다 연락이 잘 안 됐다. 한국에 가면 미진이에게 정식으로 고백하려던 내 다짐은 흔들렸고, 그저 미진이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며칠 뒤, 봉사단 뒤풀이 자리. 미진이는 어떻게 지냈냐는 내 질문에 대뜸 소개팅 이야기부터 했다.
"저 이번 주말에 소개팅해요.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들어오는 오빠라는데 그쪽 집안 좋다고 친구가 자꾸 만나보라고 해서요. 저도 마침 외로운데 잘 됐죠."
서로가 진심이라고 믿었던 시간이었다. 미진이의 손을 잡고, 별은 빛나고, 화장품 샘플도 딱 마지막으로 쓸 만큼 남아 있던 그날 밤. 모든 건 완벽하다고, 행복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미진이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미진이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게 맞을 텐데 내 마음은 아닌가 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했고, 미진이를 마음속에서 놓은 지 며칠 안 됐지만 길게만 느껴진다.
그날 그리고 오늘, 그래도 난 미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날 그리고 오늘
(원곡 : 계절이 돌아오듯이 song by 성시경)
웃으며 안아준 그대 얼굴이
날 살게 해줬던 그대 숨결이
내 눈 앞에 여기 그대로인데
더이상 그댈 안을 수 없죠
여전히 그댄 아름답죠
이젠 우린 아닐테지만
하고 싶었던 말들도
듣고 싶은 얘기도
너무나 많이 있는데도
할말을 못하죠 날 못보는 그대
흘러간 세월이 우릴 어색하게
좋았던 시절에 불렀던 그대 이름도
그저 입 속에서
차마 나오지 못해 숨어버리죠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아직도 내 눈에 그려볼 수 있는데
그댈 떠난 후로 그 웃음도
눈물조차도 나오질 않아
너무 사랑한 그대라서
부족한 날 허락할 수 없어
영원히 지켜주겠단
그 약속도 내게는
모두 다 버거울뿐였죠
또 잊고 지워도 또 보내려해도
늘 그 날만큼에 그리움이 남아
정말 아름답던 사랑받은 시간 함께
해준 그대에게
오늘 어렵게 고맙다고 말해요
나를 많이 원망했을테죠
그러니 이제는
그대 곁에 선 그 남자와는 부디
행복하길 바래
나 생각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