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 수 없는 그녀
제대 후 복학한 첫 학기. 2년 반 만에 돌아온 학교는 그대로였고, 내 마음도 신입생 때 마음 그대로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복학생일 뿐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30명이 듣는 전공 수업에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과 대표도 했고, 군대 가기 전까지 정말 열심히 과 활동을 했는데, 적어도 한 명쯤은 나의 복학 생활을 같이 하게 될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
교수님은 수업 첫날부터 이런 나를 더 힘들게 하는 미션을 던지셨다. 기말고사는 2인 1조로 하는 프로젝트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기쁘게 받아들였을 이 프로젝트가 복학하니 고역이 되었다. 대체 누구와 짝을 하단 말인가... 강제로 지정해주면 정말 좋겠지만, 전공 특성상 그렇게 하면 반발이 너무 심해서 각자 원하는 사람을 정해서 같은 조가 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어쩔 줄 몰라하던 복학생 형들의 눈빛 같은 건 1학년 땐 신경도 안 썼던 나인데... 형들의 복수를 이렇게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는 다음 주에 알려주면 된다는 말과 함께 교수님은 퇴장하셨다. 교실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확히 말하면 후배들은 이미 짝이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 한 명 나에게 와서 말을 걸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누가 봐도 막 복학한 짧은 머리의 나에게 선뜻 말을 걸어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30명이 수업을 들으니 내 짝도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이 갑자기 이 수업을 드롭해서 수강생이 29명이 되고 유일하게 짝이 없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드롭을 해버릴까 라는 편한 생각도 있었지만, 전필 수업이라 어차피 한 번은 들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드롭이냐 모험이냐... 고민을 한가득 안고 학생회관 쪽으로 걸어가던 중 내 앞에서 걸어가는 한 여자를 보았다. 아까 수업 시간에 내 앞에 앉았던 사람인데... 이 사람도 나처럼 혼자 앉아 있어서 내가 또렷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난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난 결정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500원짜리 동전을 사용했다. 너무 중요한 결정 말고, 예를 들면 새벽 1시 있는 박지성 축구 경기를 볼지 말지와 같은 것. 어렸을 때 수도 없이 종이학을 접었던 나는 학은 무조건 행운의 상징이라고 믿었다. 신기하게 학이 나와서 축구를 볼 때면 박지성이 골을 넣곤 했다. 이 동전에 수업의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동전에 정성스레 숨을 한 번 불어놓고 하늘 위로 튕겼다. 하늘을 날아 내 손등 위에 사뿐히 안착한 동전은 내게 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여자에게 달려가서 말을 걸었다.
"혹시 방금 저랑 같은 수업 듣지 않으셨나요?"
"아.. 네. 맞는 것 같아요."
"혹시 기말 프로젝트 그거... 조 누구랑 할지 결정하셨어요?"
"아.. 아니요. 저 이번에 편입해서 아는 사람이 아직 한 명도 없거든요."
그렇게 나는 그 수업을 드롭하지 않았고, 그녀와 한 조가 되었다. 복학생과 편입생. 어울릴 듯 말듯한 이 조합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학교에 서로 의지할 곳이 없었기에, 우리는 꽤나 같이 붙어 다녔다. 난희라는 이름의 그녀에게 난 학교의 이곳저곳을 소개해줬고, 난희는 나에게 민간인의 감각을 일으켜줬다.
전역하던 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도, 대학교로 돌아가 다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는 설렘도 잠시, 생각보다 복학생의 삶은 버거웠다. 손으로 필기하는 학생보다 노트북을 사용하는 학생이 더 많아졌고, 추억이 가득했던 옛 식당들은 화려한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변해있었다. 자리 위에 가방만 올려두면 끝났던 도서관은, 주인은 놀러 가고 가방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켰던 그 도서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그 자리를 찾아가서 앉아야만 하는 새로운 시스템은 몇 번을 해봐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희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우리는 전공 수업을 2개나 같이 들었기에 일주일에 4번은 얼굴을 봤고, 일주일에 2번은 점심을 같이 먹었다. 여전히 바깥세상 많은 것들이 낯설었지만, 난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익숙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봄바람이 지나고 하나둘 반팔이 거리에서 보이기 시작할 즈음, 난희에게서 문자가 왔다.
"혹시 소개팅할래?"
사실 전역할 때는 복학만 하면 예쁜 여자 친구가 생길 거라 믿었다. 겨울방학 내내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돈도 많이 모아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으니 처음에는 자신감도 넘쳤다. 하지만 복학 첫날부터 교실 뒤쪽 구석에 앉아야 할 것만 같은 그 분위기와 함께 나는 금방 존재감 없는 복학생으로 전락해 버렸다.
오래된 동기 한 명 보이지 않는 캠퍼스와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 없는 원룸 생활이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 소개팅이라는 단어는 잠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난희랑은 거의 날마다 문자를 했고, 난희에게 문자를 보낼 때 한 번도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문자에는 답장을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당연히 "응"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내 머리는 내 손가락을 정지시키고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소개팅?"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보낸 답장이 이거였다. 난희에게 이렇게 짧은 문자를 보냈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답장은 어색해 보였다. 내가 난희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 했는데, 단 세 글자로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난희와 함께 늦은 저녁을 같이 먹은 그날, 기분이 좋아 난희 집까지 바래다준 그날, 난희 집이 멀어서 조금만 더 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날, 난희는 불쑥 내게 말했다.
"저기 저 아파트에 내가 좋아하는 오빠가 살거든. 지금 지나가다가 그 오빠 딱 마주치면 신기하겠다. 그 오빠도 우리 학교 다니거든.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편입한 것도 그 오빠 때문이었어. 하필 그 오빠가 이번 학기 휴학 중이라 학교에서 못 봐서 아쉽기는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참 멀었던 그날, 집에 돌아와 던져본 동전 속 학마저 날 외면했던 그날, 친구는 친구일 뿐이라고 수천번 외쳤던 바로 그날. 그날로부터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인데... 소개팅이라는 단 세 글자의 문자에 난희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음에도, 난희에게 문자가 왔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군대는 끝나는 날이라도 있었는데, 이건 끝나는 날이 있는 건지, 있다면 언제 어떻게 끝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울리는 난희의 문자에 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곧 기말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하고, 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난희와 함께 보낼 것이다. 그 시간의 이름이 희망고문일 것 같아 슬프지만, 그래도 기말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는 생각에 그새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동전을 하늘 높이 던져본다. 학이냐 난희냐. 학이 나와도 난희고, 학이 나오지 않아도 난희인 것을.
가질 수 없는 그녀
(원곡 : 돌아보다 song by 민경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죠
그저 그냥 바라보네요
그녀에게서 연락이 와요
이제는 잊으려 했는데
어느새 답장하고 있죠
어느새 미소짓고 있죠
우리는 그냥 편한 친구였는데
내 맘에 왜 불쑥 들어와
잊으려 할수록 가슴만 아픈데
바라볼수록 자꾸만 가슴 뛰는데
웃으면서 그녀는 내게 말해
그녈 단념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남자를
그녀는 차갑게 보였죠
가까워질 생각조차 못했는데
기회가 닿고 우연이 모여 이젠
그녀 가까운 곁에 있죠
가까워질수록 추억만 쌓이고
덜어낼수록 추억은 깊이 박히죠
연인 아닌 우린 친구로 함께
잔인한 희망만 더해가
내 눈앞에 가까이에
그녀가 있는데도
가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게 눈물 나
그녀를 볼수록 가정만 늘어가
안 친했다면 내가 더 잘났더라면
눈물나도 결국 그녀 곁으로
가야하는 나를 잘 알기에
오늘이 더 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