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연애소설] 만우절에는 복수할 거야!

4월 1일

by 휴리릭

은비는 내 1년 후배다. OT를 위해 신입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부터 은비는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예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은비와 같은 조도 아니었는데 OT 내내 은비와 같이 이야기할 기회가 계속 생겼다. 은비는 내 말 하나하나에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웃어줬고, 정말 무심한 남자가 아닌 이상 그 어떤 남자라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은비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OT행사 총책임자였던 나는 2박 3일 동안 거의 잠을 못 잤지만 괜찮았다. 피곤한 눈을 비벼가며 은비가 "오빠 사회 보는 거 진짜 멋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내게 더 이상 잠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개강 후 첫 주말은 중요하다. 개강 첫 주 평일은 수업을 듣고 수강신청을 최종 확정하느라 다들 학교에 나오기 때문에 다 같이 모여서 밥 먹고 노느라 바쁘다. 하지만 주말은 다르다. 개강 후 첫 주말부터 학교에 오는 신입생은 없다. 게다가 금요일은 개강파티였다. 토요일에 멀쩡한 몸과 정신으로 있기는 어려웠다.

"오빠 오늘 뭐해요? 저 오늘 심심해서 학교 갈까 하는데 혹시 오빠도 학교 오나 싶어서요."


오늘은 컵라면으로 해장을 해야 하나 싶어서 찬장을 뒤지고 있던 차에 은비에게서 연락이 왔다. 은비는 숙취도 없나 생각하다가 어제 은비는 집이 멀다며 일찍 개강파티에서 나간 것이 기억났다. 마침 비슷한 곳에 사는 내 동기 영석이가 데려다준다고 했던 것도 생각났다. 술을 좋아해서 술만 마시면 멀리 있는 집 대신에 친구 집에서 항상 신세를 졌던 영석이가 술을 마다하고 은비를 데려다준다길래 다들 신기해했던 것까지가 어제의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술은 좀 덜 깼지만 은비가 온다는데 안 나갈 수 없었다. 개강 첫 주라고 일주일 내내 술로 달렸기에 오늘은 반드시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몸에서 에너지가 샘솟았다. 컵라면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얼른 편의점에 가서 숙취해소 음료도 마셨다.

'대체 은비가 이 황금 같은 주말에 왜...?'라는 의문은 있었지만 은비가 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누군가가 날 보고 호구라 불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신입생으로 1년을 보내는 동안 난 제대로 된 연애를 못했다. 동기 CC는 7호까지 탄생했지만 난 해당되지 않았다. 한 명의 여자를 열렬히 좋아하기에는 내가 사랑이라는 걸 잘 몰랐던 것 같다. 아니면 그럴만한 여자가 동기 중에는 없었거나.

숙취는 정신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은비는 깨닫게 해 줬고, 그다음 주말에도 은비는 학교에 왔다. 우리는 그렇게 사귀게 됐다. 학기가 시작된 지 2주도 안 된 시점이었지만, 매일같이 오랜 시간을 봤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은비는 인기가 많았다. OT 때 내 남자 동기 몇 명은 숙소 뒤쪽 공터에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신입생들 중에 누가 가장 예쁘냐는 초등학생 같은 주제였다. 지성인들이 모인다는 대학교가 맞나 의심될 만큼 수준 낮은 주제였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난 그 토론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귀는 열어두고 있었다. 가장 언급이 많이 된 건 은비였다. 역시 남자들이란 다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은비는 날 만날 때마다 핸드폰을 열심히 봤다. 우연히 보게 된 은비의 톡 목록에는 내 동기 남자들이 순서대로 정렬해 있었다. 그 토론에 참여했던 동기들은 모두 있었다.



은비와의 연애를 아직 오픈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 CC인걸 섣불리 오픈했다가 금방 헤어지고 불편해지는 동기들을 봤었다. 나는 은비와 헤어지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그래도 은비를 위해서 시간을 두고 우리의 연애를 오픈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을까... 은비는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둘이 있을 때는 세상 누구보다 내게 잘해줬지만, 학교에서 만나면 내게 보여준 다정함을 내 동기들에게도 똑같이 보여주고 있었다. 영석이는 다른 동기들보다 그걸 더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고.


우리가 사귄다는 것을 오픈하기 전부터 우리의 연애는 삐걱거렸다. 은비는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내 동기들과 톡을 했다. 은비는 고등학교 친구와 연락 중이라고 했지만 나는 우연히 영석이라는 이름을 봐버렸다. 차라리 오픈해서 은비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정당하게 차단할까도 했지만, 흔들리는 연애 상태로 오픈하는 건 서로에게 득 보단 실이 많을 것 같았다.


은비의 집은 학교에서 꽤 거리가 있었고, 난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은비는 매번 집에 가는 길에 내가 함께 해주기를 원했다. 물론 좋아하는 마음으로 은비를 바래다주는 왕복 2시간이 엄청 긴 시간은 아니었다. 문제는 은비의 마음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이 자꾸 느껴졌다는 거다. 은비 집으로 가는 1시간은 은비와 같이 걸어가니 괜찮았지만, 돌아오는 1시간은 꽤 길게 느껴졌다. 게다가 은비는 나와 헤어지면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집에 가서 씻고 정리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게 잘 도착했냐 라는 연락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확 타오른 불꽃은 빠른 속도로 식어갔다.




3월의 마지막 날. 고등학생 티가 아직 많이 나던 신입생 후배들도 이제는 제법 대학생 같아 보였다.

전공수업이 끝나고 병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일 특별한 계획 세웠어?"

"내일? 내일이 무슨 날이야?"

"뭐야. 내일 만우절이잖아. 작년에 너 때문에 엄청 재밌어서 올해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우리 과는 전통적으로 만우절 행사를 크게 한다. 행사라고 이름 붙였지만 공식적으로 어떤 걸 진행하는 건 아니다. 그저 우리끼리 얼마나 더 재밌고, 기발한 걸로 만우절을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대학교라는 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매력이 있다. 각자가 겪은 만우절 에피소드만 모아도 충분히 몇 년치 시나리오는 만들 수 있다.


교실 바꾸기는 기본이고, 가짜 커플 만들기, 기억상실인 척 하기 등...


작년에는 과대인 내 주도로 몰래카메라를 했었다. 교수님을 속이는 거라 조금 무모하긴 했으나 교수님은 흔쾌히 이해해주셨다. 교수님이 이제 전국적으로 너무 유명해지셔서 이미지 관리를 하셨어야 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맞다 그랬었지. 평상시 같았으면 일주일 전부터 만우절 계획을 세운다고 동기들하고 술을 마셨을 텐데. 요새 은비와 사이가 불안해지면서 만우절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멀리 은비가 보였다. 내 동기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은비가. 그리고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친구가 있으면 절대 하면 안 되는 그 생각. 하지만 난 공식적으로 여자친구가 없는 상태다. 다른 남자들에게 계속 웃고 있는 은비를 보니... 이걸 실행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행해야겠다. 복수라면 복수일 수도 있고. 나를 더 봐달라는 투정일 수도 있겠지만.

만우절을 기념하여 마음에 드는 후배와 연인 행세를 해보자는 내 제안을 병현이는 받아들였다. 언제 왔는지 어느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영석이도 좋다며 찬성했다. 그리고 본인은 꼭 은비랑 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만우절이라 장난을 칠 수 있다고 하지만 이건 상대가 허락해야만 가능한 장난이다. 은비가 허락할리 없다고 믿었다. 정작 나는 다른 후배와 하려고 마음먹었으면서 말이다.




"안녕 여은아? 나 오늘 네 남친이야. 오늘부터 우리 1일이야!"


말도 안 되는 말을 여은이에게 던졌다. 시뮬레이션은 미리 해뒀다. 여은이가 만약 노골적으로 거부하면 만우절 장난이라고 웃어넘기는 걸로. 그리고 다른 여자 후배에게 같은 말을 또 하는 것이다. 물론 여은이 다음에는 누구한테 할지 생각해두지는 않았다. 어제 이 장난을 떠올렸을 때부터 생각나는 건 여은이밖에 없었다. 워낙 만우절에 신기한 장난을 많이 치는 과 분위기상 여은이가 나를 크게 이상한 남자로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게다가 난 과대 출신이다 보니 조금 더 너그러운 것도 있을 테고.


"1일? 1일 만에 헤어져도 돼요?"

여은이는 웃으면서 내 장난을 받아줬다.


여은이 옆자리에 앉아서 전공 수업을 들었다. 난 이미 작년에 들은 수업이지만 여은이 옆자리여서 그런지 느낌은 새로웠다. 항상 여은이 옆자리에 앉는다는 하경이는 어느새 병현이 옆에 앉아있었다. 은비는 어디에 앉아있는지 찾아봤지만 안 보였다. 어젯밤에도 찝찝한 톡을 마지막으로 은비와 연락은 끝났고 오늘은 은비에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은비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잠깐 궁금했지만 만우절을 즐기자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여은이 옆에서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여은이와 점심을 같이 먹고 이 장난을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오늘 13시 수업은 교수님 사정으로 휴강됨을 알려드립니다."


나랑 여은이가 듣는 1시 수업은 달랐지만, 우린 같은 문자를 받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충분히 의심해 볼만한 상황인데... 오늘이 만우절이라는 사실을 한 번만이라도 깨달았다면 이 문자가 장난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지금의 상황극에 취해버린 나머지 우리는 행복한 함성을 지를 뿐이었다.




여은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오늘 정말 행복한 하루였다. 내일도 만우절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오늘 은비랑 연락을 한 번도 안 했구나...

이상했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은비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니까.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할 필요는 없지.


지하철에서 내려 일부러 마을버스를 타지 않았다. 마을버스를 타지 않으면 기숙사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것도 평지가 아닌 언덕길을.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괜한 죄책감에 나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고 싶기도 했다.


은비가 다른 남자와 연락하는 것을 비난했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은비가 아닌 다른 여자와 연인인 것처럼 하루를 보냈다. 은비가 잔잔한 잽을 날린 거라면 난 한 번에 KO 펀치를 날린 거다. 은비에게 알게 모르게 잽을 너무 많이 맞아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은비를 정말 좋아했다면 복수 대신 설득이나 눈물을 택했겠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은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펀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을.



기숙사로 가는 내내 은비에 대한 죄책감과 여은이에 대한 설렘 사이에서 괴로웠다. 그래도 나는 아직 여자친구가 있으니 도덕적으로 문제 될 일은 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여은이와의 오늘은 즐거운 만우절 불장난이었다고 생각하고 내일부터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기숙사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컴퓨터를 켰다. 시계는 00시 0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었던 만우절이 끝났구나 생각하며 우리 과 카페에 들어갔다.


"은비랑 영석이랑 사귄대! 만우절 거짓말 아님! 지금 12시 넘었으니 4월 2일임!"


이런 글과 함께 은비가 영석이랑 손잡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영석이만큼이나 술을 좋아하는 병현이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올린 것 같았다.


'장난이 좀 심했네...'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오늘 왜 여은이 손 잡아볼 생각을 못했지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댓글이 달렸다.


"병현 오빠! 제가 말하려고 했는데 미리 선수 치시다니..ㅎㅎ 영석 오빠랑 잘 만나겠습니다~"


은비한테 KO패를 당했다.





4월 1일

(원곡 : 사람찾기 Song by 유리상자)


전날 밤 잠도 안 자고

내일을 어떻게 할까

밤새 고민했지

조금은 어색했었던

우리 사이를 전보다

편하게 해 봐야지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했지

어젯밤 어렵게 결정했던 오늘 일들을

옷을 입고 머리에 신경도 쓰고

설렌 마음으로 너에게로 갔지


정말 용기를 내서 말을 했지

우리 사귀는 척해보자고

웃음으로 너 나를 바라봤을 때

빨개졌던 내 얼굴



같이 앉아 전공 수업도 듣고

네가 나에게 사준 점심도 맛있게 먹고

하루 종일 함께한 그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


제발 오늘 하루가 영원하길

오늘 같은 날만 계속되길

너와 함께한 4월 1일 하루가

내겐 기쁨이었어


매일 그날의 추억 떠올리며

하루를 아름답게 살아가

나 그날처럼 너와 함께하면서

행복해도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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