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연애소설] 사랑은 구내염과 같아서...
어린 사랑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부할게요. 사내 연애는 조심하세요. 당사자들에게는 비밀이겠지만, 사실 전부 다 알아요. 그게 할 땐 즐거워도, 깨지면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회사 생활은 원래도 힘든 건데 말이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퇴장한 차장님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입사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
'사내 연애라... 연애라는 단어가 참 낯설다.'
3년의 청춘을 방황했던 나는 나이 서른이 되고 겨우 취업에 성공했다. 사실 이 회사가 좋아서 온 건 아니었다. 나이가 많아져서 마땅히 갈만한 곳도, 도전할 힘도 없었다. 그래도 살긴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몇 군데 지원했고, 다행히 이 회사에서 날 받아줬다. 3년 동안 방황하며 허공에 날린 내 시간과 젊음을 이해해 주는 곳이 그래도 여기뿐이라는 생각에 최대한 정을 붙여보고 싶었다.
작은 회사라서 그런지 동기라고 해봤자 나를 포함해 5명밖에 없었다. 남자 둘, 여자 셋. 다른 남자 한 명은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이나 많았고 내성적인 성격인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방황의 삶을 살았던 나에게 이런 류의 조직 생활은 군대 이후에 처음이었기에 나도 딱히 나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면 나서는 사람이 누군가는 꼭 있기 마련이다. 여기가 본인의 세 번째 회사라는 서영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반장은 병진 오빠가 하는 게 어때요? 나이도 딱 중간인 것 같고, 잘할 것 같은데?"
"나? 아, 나는..."
"오! 반장님! 반장님!"
서영이는 순식간에 날 반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다른 동기 2명의 성원에 힘입어 나는 별다른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동기 반장이 됐다.
사실 반장이라고 특별한 임무가 있는 것 아니었다. 가장 큰 임무라면 우리 동기들 식사 약속을 잡는 것 정도였으니까. 정말 오랜만에 세상에 고개를 내민 것이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반장이라는 감투도 하다 보니 마치 원래 내 것인 것처럼 잘 맞는 것 같았다. 동기들하고도 연락을 더 자주 하다 보니 금방 친해지는 것 같았고.
퇴근을 하고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난 늘 한강변을 걸었다. 방황하는 시절 동안 대부분의 친구들과 연락이 끊겼기에 나는 약속이 거의 없었고, 저녁에는 어김없이 한강변을 걸었다. 아직 수습 시절이라 월급은 용돈 수준에 불과해서 취업을 했지만 저녁의 삶은 백수 시절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하긴 3년을 했는데... 취업했다고 갑자기 안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걷다 보니 눈앞에 어느새 63 빌딩이 가까워졌고, 집으로 방향을 돌려 걸으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서영이었다.
"지금 뭐해? 어디야? 당장 말해봐!"
"응? 아... 나 한강 산책 중이야.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어디 한강? 여의도랑 가까워?"
"응. 그렇긴 하지. 63 빌딩이 가까이에 보이니깐."
"그럼 빨리 뛰어와. 나 여의도 한강에 있어. 얼른 와. 얼른 오라구!"
"지금? 나 운동복 입고 있는데... 우리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
"내일은 내일이고 지금은 오늘이잖아! 빨리 와!"
전화를 끊고 나니 첫날부터 목소리와 행동에 자신감이 넘쳤던 서영이다운 통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장은 나지만, 서영이가 뒤에서 다 조종해주는 것 같은... 서영이는 나보다 2살이 어렸지만, 이미 내게 말도 편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방향을 돌리고 63 빌딩을 향해 걸어갔다.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날 불러준다는 사실이 그리웠고 좋았다. 걷거나 뛰는 건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서영이 눈앞에 내가 다가갔을 때 서영이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뭐야? 나 기다렸어?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헉헉. 그게 후우. 그니까 헉헉."
"됐고. 빨리 앉아서 맥주나 한 잔 하자고. 짠!"
서영이는 나의 의사도 묻지 않고 맥주캔을 따서 내게 건넸다. 내가 술은 잘 못하지만, 더운 여름날 뛰고 나서 마시는 맥주는 정말 달콤했다.
"근데 넌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설마 혼자 술 마신 건 아니지?"
"아니거든? 난 오빠처럼 친구 없는 사람이 아니거든! 친구랑 한 잔 하다가 친구는 집에 갔어. 그래서 한 번 연락해 본거야. 오빠는 친구 없어서 나올 것 같았거든."
"나도 친구 있는데 다 멀리 있어서 그래. 나 바쁜데 일부러 나온 거야."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도 했다는 말이 입 바로 앞까지 나왔지만, 그 말은 아꼈다. 아직은 회사의 누군가에게 나에 관해 자세하게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옛날 생각을 하면 괜히 지금의 내 처지가 안쓰럽기도 했고.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라는 말을 서영이가 10번쯤 할 때까지 우리는 같이 있었다. 이미 술을 많이 마신 서영이는 자꾸 맥주를 찾았다. 기자들을 술을 잘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기자를 하다가 이 회사에 왔다는 서영이가 그 이야기에 진실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느새 새벽 2시. 더 이상은 무리인 것 같아서 서영이를 부축해 택시를 타고 서영이의 집 앞까지 갔다.
"얼른 가서 조금이라도 눈 좀 붙여. 몇 시간 뒤에 회사에서 봐야겠네. 나 이제 간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서영이가 날 안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몇 초간 안겨 있었다. 누군가를 안는다는 것이 너무 어색해서 서영이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만취해 있는 서영이는 날 놓아주지 않았고 나도 가만히 있었다. 사실 나도 그 품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순간이 내 회사 생활을 완전히 바꿔놓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사실 한 번쯤은 서영이의 남자 친구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Yes라는 대답을 들으면 뭔가 서운할 것 같았고, No라는 대답을 들으면 불안할 것 같았다. 사내 연애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대학교 때 CC를 하다가 과 동기에게 환승한 여친을 겪은 이후로 다시는 같은 조직 내에서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토요일에 뭐해? 특별한 거 없지?"
"내 스케줄 감시해? 아직까진 없을 뿐이야. 아, 아니다. 이번 주말에 동아리 야구시합 있어."
"야구 꼭 안 가도 되잖아? 나랑 남이섬 가자."
서영이는 일방적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말해주는 것 같았으니까.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동기랑 단둘이 남이섬이라니... 한강을 걷다가 유달리 기분 좋은 날씨에 나도 모르게 흔쾌히 허락한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영이는 왜 맨날 나 한강에서 걷고 있을 때만 전화하는 거야. 생각 안 하고 계속 다 허락해 버리는 것 같은데...'
서영이는 퇴근 후에 전화했을 뿐이고, 나는 퇴근 후에 맨날 한강을 걸었으니 당연한 결과임에도 그런 논리적인 생각까지 할 여유는 없었다. 날씨에 취해 너무 많이 걸었으니까.
남이섬에서의 기억은 흐릿하다. 마지막 장면만이 생생할 뿐. 서영이가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날 좋아한다고 말한 그 장면만이 한동안 내 머릿속에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9년 만에 다시 CC를 시작했다. Campus Couple이 아닌 Company Couple을.
그즈음 구내염이 자주 생겼다. 원래 피곤하면 바로 구내염이 생기는 체질인데, 신입 생활도 쉽지 않은데 거기에 날마다 한강 산책도 하고 서영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갔으니까.
구내염은 골든타임이 있다. 구내염이 막 하얗게 점처럼 생겼을 때 약을 바르면 하루 이틀이면 깔끔하게 사라진다. 하지만 그 골든타임을 놓쳐서 이미 하얀 동그라미가 육안으로 확인된다면 늦어버린 거다. 그때부턴 약을 발라도 하얀색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서영이를 만나고 처음엔 정말 행복했다. 3년 만에 어딘가에 소속돼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도 좋았지만, 그곳에서 서영이를 만나고 서영이와 함께 놀 수 있고 선물을 사줄 수 있는 월급이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CC라서 좋은 점도 많았다. 특히 회사 뒷담화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서영이가 욕하는 팀장을 나도 잘 아니까 같이 신나게 욕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서영이와 내 여자친구로서의 서영이는 너무 달랐다. 회사에서는 자신감 넘치고 활기차던 서영이는 나와 둘이 만날 때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자주 아프고, 피곤해하고, 힘들어했다. 회사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와 둘이 있을 때면 자주 그랬기에 나도 힘들었다. 건강을 위해 같이 한강도 걸어봤지만,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는 서영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서영이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려고 했다. 나는 술이 안 받는 체질이었고, 서영이는 술을 한 번 마시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서영이의 완벽한 술 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서영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와 한강 산책을 몇 시간 동안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서영이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술 약속에 갔다. 그것도 내가 아는 회사 사람들과의 술자리에 갔다. 술 좋아하는 남자 선배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했다. 모두 유부남이고 그래서 더 안전하다고 서영이는 강조했다.
차라리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랑 술을 마시지 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서영이가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나는 한강 산책을 하면서 자꾸 그 술자리를 상상했다. 내가 다 아는 사람들이기에 매우 뚜렷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술자리에 참석도 해봤지만, 서영이가 취해 가고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어서 그 뒤로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남자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서 싫었다기보다는 서영이의 스트레스를 푸는 자리에 내가 없다는 것이 싫었다.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여기에 관해 서영이와 빨리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니 우리의 관계는 마치 커져버린 구내염처럼 약을 바르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서영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횟수가 늘어났고, 술에 취해 연락이 안 되는 밤이 많아졌다.
그리고 서영이가 술에 취해 내게 전화한 어느 밤, 나는 화가 나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우리의 관계는 시작도, 끝도 서영이가 술을 마신 밤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CC는 헤어지면 정말 괴롭다. 헤어져도 계속 얼굴을 봐야 하니까. 특히 우리는 동기였기에 동기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힘들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동기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셨지만, 내 눈은 계속 서영이를 보고 있었다.
홧김에 헤어지자고 말했지만 정말 진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말은 해버렸고 이별을 되물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며칠 지나고 나니 그제야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고 서영이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 역시도 골든타임을 놓친 것 같아 하지 못했다.
사실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해봤지만 내 전화는 차단되어 있었고, 카톡의 숫자 1은 그날 이후로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또 흘렀다.
칼퇴를 하고 지하철역까지 뛰어가서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서영이 집 앞으로 갔다. 칼퇴하고 뛰어가서 지하철을 탔으니 서영이가 나보다 서영이 집에 일찍 도착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지금부터 서영이를 기다려 보려고 한다. 서영이가 혹시 오늘 약속이 있다면 집에 늦게 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 기다려 보려고 한다. 어차피 모두 너무 늦어버린 거 지금이라도 내 마지막 말은 하려고 한다. 내 사랑이 어려서 널 힘들게 했다는 그 말을...
30분째 바라보고 있는 파란 하늘이 붉어질 즈음, 익숙한 신발이 보였고 손이 보였고... 서영이가 보였다.
"서영아"
어린 사랑
(원곡 : 너를 너를 너를 Song by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또 져물어가
네가 없는 오늘 하루와
내가 없는 네 하루가
같은 슬픔일지
어제완 너무 다른 오늘이
입안이 헐었어 우리도 헐어버렸어
하지 못했어 알면서도
조금 일찍 내가 약을
발랐다면 우리 둘의 관계도
지금처럼 아프진 않았겠지
나의 사랑이 아직 어려서
이제야 눈물 참는 법을 배워가
참아왔었던 눈물이 멈추지를 않아
너를 향한 그리움도 계속
언제부터인가 피곤함이 커져갔어
처음과는 다른 변해간
너를 향한 걱정 불안
널 지키려 계속 곁에 두려
내 마음이 너를 앞서갔나봐
나의 사랑이 아직 어려서
웃으며 너를 안지를 못했나봐
한발만 뒤로 물러서 너를 안았다면
계속 내 곁에 있었을까
후회와 눈물이 영원히 남아있어도
네 숨결 내 맘에 숨셔도 이제 보내줄게
나의 사랑이 아직 어려서
네 오른손을 허전히 만드나봐
나의 왼손은 습관처럼 네 오른손
찾아보고 텅 빈 공기만 잡고 있어
나의 사랑이 아직 어려서
잠깐의 아픔 피하려 했었나봐
추억이 울고 마지막 내 말 못 전해도
이젠 너를 보내줄게 모두 놓을게
그래도 너는 꼭 행복해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