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굳어버린 습관

잠시 멈춰 선 자리에서

by Hewii

집에 돌아온 나는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 필요한 일들을 한 가지씩 적어보기 시작했다. 수학, 독서, 여행.. 몇 가지 공부들, 세상 구경. 몇 가지를 적다 보니 내 직업과 관련된 것들이 꽤나 많았다. 하루라는 정해져 있는 시간에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적어 내려간 목록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남아있던 것들도 있었다. 읽고 싶던 책, 하고 싶은 공부들을 적어 놓은 적이 있었다. 목록에는 계속 남아있던 것들이 있었다. 노트 위에 빗금이 없는 글자들은 필요한 것, 했던 것, 하고 싶은 것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조금 구체적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노트에 적힌 세 가지 항목에 중복된 것들이 있었다. 여기서 그동안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추렸다. 지금이 아니면 쉽지 않은 것들을 우선으로 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는 몇 글자들에 빗금을 그었다. 결국 세상 구경, 독서, 수학이라는 글자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세상 구경은 몸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한 걸어 다니며 여기저기 다녀 보기로 했다. 새로운 곳, 익숙한 곳을 같은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가보기로 했다. 항상 같은 나의 일상이 아닌, 낯선 사람들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나는 관찰자가 되어 세상을 산책해 보고 싶었다.


오래전에 이런 것들을 꽤나 즐겼다.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같은 목적지라도 다른 길을 다니며 그 풍경을 관찰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하루는 정해져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생각, 같은 목적만이 있는 하루가 쌓여갔다. 그렇게 굳어진 습관은 편했지만, 나는 호기심을 잃고 있었다.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내 시선은 책장에 머물렀다. 책장에는 최근에 읽었던 책들이 주로 있었다. 자기 계발서, 성공한 자의 이야기들, 마케팅, 경제와 관련한 책들. 그리고 오래전 읽었던 책이 쌓여있는 창고를 가보니 조금 달랐다. 소설, 에세이, 인문학, 직업과 관련된 책들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잠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나에게 독서는 치료제였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면서 어릴 적 난독증이 있었던 나는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고, 느렸다. 나의 공부는 대부분 암기였다. 친했던 한 친구가 있었다. 특별히 공부를 특별히 하지는 않았지만 성적이 꽤나 좋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더 어린 시절부터 틈틈이 책을 읽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책가방에는 항상 소설책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 서점에 갔다. 표지의 그림과 굵게 쓰인 글자를 봤다. 책의 표지는 넘어가지 않았지만, 나는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골랐다. 어떤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좀처럼 넘어가지 않던 페이지가 조금씩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첫 독서였다. 그 이후로 새로운 책을 사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 군복무 시절, 전역을 앞두고 꽤나 고생스러웠던 군생활을 했었다. 기특하게 생각해 준 간부들의 배려로 한 달 정도 정말 아무것도 안 했던 시간이 있었다.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내무반에 있었던 장편 판타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생의 첫 판타지 소설이었다. 글씨만 빼곡하게 적혀있던 책 위로 눈이 지나가면 머릿속에는 장면만 남았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상, 휴게실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책을 읽어 나갔다. 그때 독서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소설책과 에세이를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받았고, 인문학을 보며 세상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그때 당시 책을 읽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몇 장을 읽고, 나는 책을 덮은 뒤 그 내용을 곱씹었다. 깊이 생각을 했고, 다양한 생각을 했었다.


고르는 책들이 바뀌면서 내용을 되뇌며 생각하는 시간은 짧아졌고, 그저 많이 읽고 싶어 그저 읽어나가기 바빴다. 자기 계발서가 유행했고, “독서는 뇌 활동을 하게 한다. 성공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따위의 유혹에 조바심이 쌓여갔고, 그렇게 나의 독서는 생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마음에 남아있는 글의 장면들은 어릴 적에 위안받았던 책들 뿐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독서라는 글자 앞에 “즐거운”라는 세 글자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나의 전자책에 몇 가지 소설을 가상 서재에 옮겨 담았다. 읽어 보고 싶었던 고전 소설, 판타지 소설 등 그저 읽어보고 싶었던 것들을 담았다. 숙제처럼 느껴졌던 책이 마치 쌓여있는 게임시디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시선은 그다음 수학이라는 글자를 바라봤다. 수학은 언제나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수학을 잘 몰랐다. 사실 의미 모를 공식들을 암기해야 하는 것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암기위주의 공부 방식은 나에게 수학을 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수학에 대해서 미련이 있었다. 누군가는 '세상은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했지만, 그 의미를 몰랐다. 그래서 나는 수학의 역사에 관련된 책을 한 권 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단순한 산수에서 지금의 수학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를 발전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들과 함께 수학을 공부했더라면 꽤나 즐거웠을 것이라 느꼈던 때가 있다.


수학은 내가 직업을 가지고 나서 가끔씩 나를 괴롭히는 학문 중 한 개였다. 단순히 흥미만 가지고 있던 터라 따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보니, 일에 필요한 논문을 읽다 보면 어지러움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틈틈이 공부하려 책은 샀지만 일에 치어 페이지가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여유를 두고 조금은 수학과 친해질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수학 옆에 “20p”라고 적었다. 이 정도면 한두 달이면 오래전부터 첫 장부터 중간 어딘가를 계속 반복했던 이 책을 다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런 계획을 적는 것은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해서 눈에 보이게 하는 것. 그리고 마음에 새겨 넣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노트를 덮고 시행착오를 겪을 뿐이다.


하루를 도서관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무게를 잠시 덜어놓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앞으로의 일은 차차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정한 길이다.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나의 삶의 끝에 도서관 창가에 앉은 미소 지은 노인이 머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