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 선 자리에서 - 15
계획을 세우고 난 뒤 첫 아침이었다. 나는 아내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도서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때마침 집에 냉장고에는 빨리 먹어야 할 채소들이 있었다. 그것들로 간단하게 도시락을 만들기로 했다. 왠지 모르게 궁상맞은 기분은 들었지만, 버리기는 아깝고 도서관 근처에서 끼니를 해결하려면 꽤 먼 거리를 가야 했다.
냉장고에서 미리 삶아두고 먹었던 닭가슴살을 꺼내고, 방울토마토, 파프리카 양파를 채 썰었다. 닭가슴살을 결대로 찢어 작은 통에 야채와 함께 넣었다. 이대로 먹기에는 아쉬워 간단하게 소스를 만들었다. 마침 좋아하는 화이트 발사믹이 있었고, 꽤 괜찮은 올리브오일이 있었다.
화이트 발사믹과 올리브오일의 조합은 아주 좋다. 화이트 발사믹의 단맛과 싱그러운 향, 그리고 적절한 산미가 방울토마토의 맛을 극대화시켜 주고, 좋은 올리브 오일의 매큼한 맛과 향이 단조로울 수 있는 맛을 채워준다. 일반적인 발사믹보다 화이트 발사믹은 약간은 더운 날씨에 잘 어울린다.
나는 도시락과 수학책을 가방에 넣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푸른 하늘과 상쾌해진 바람, 그에 흔들리는 우거진 나무들이 간밤에 굳은 몸을 이완시켜주는 느낌이었나. 1년 중 그리 많지 않은 그런 날씨였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날씨가 좋은 아침이면 조금 일찍 나와 걸었다. 이런 날씨에 길을 걸으면 그 하루가 기분이 좋았다. 아침이 항상 이렇게 여유롭다면, 출근길이 무겁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일찍부터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게 만드는지. 이런 기분을 하루 중 잠시뿐인 아침, 그리고 날씨가 화창한 날에만 느낄 수 있는 이것을 포기하게 하는지. 무심한 도시는 이런 아침을 빼앗아 가기 바빴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어릴 적 등굣길과 같았다. 그 시절에도 유독 이른 등교시간과 쏟아지는 아침잠을 참아내며 바쁘게 학교로 뛰어갔다. 간혹 될 대로 되라며 지각을 한날도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제시간에 도착하는지 쏘아보는 이가 없었다. 조금 걷다 보니 어릴 적 다녔던 학교가 보였다. 방학이 아니었지만 학교는 고요했다.
나는 도서관에 도착하기 전 커피를 한잔 샀다. 커피는 어릴 적 동경이었고, 지금은 동반자가 되었다. 어릴 적에 집에서 가끔 나는 원두커피의 향기는 나를 항상 자극했다. 그 시절엔 아이들에게 커피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몰래몰래 마셨지만, 집에 남아있는 커피의 향기 덕분에 부모님을 속일 수는 없었다.
과거에 카페에서 꽤 오래 일한 적이 있었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고, 청소를 한 뒤, 창가에 앉아 커피를 한잔 하면서 꽤나 행복감을 느꼈다. 일을 할 때, 책을 볼 때, 공부를 할 때 한 모금을 머금고 목으로 잡념과 함께 넘겨 내면, 입안에 커피 향이 가득 채움을 느낄 때 찰나의 여유를 가져다준다. 나는 그때의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어 첫 한 모금의 커피를 잠시 뒤로 미루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도서관 앞의 작은 분수는 푸른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분수에서 다시 뿜어진 푸른 햇살은 도서관에 푸른 줄무늬를 남기며 울렁이고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가니 창가는 한적했다. 여느 도서관과는 다르게 평온하다. 자리를 맡으려 치열하지 않고, 단지 몇 사람들 만이 자리를 채우고 앉아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고, 나는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그 한 모금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의사와 약속한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작은 독서대를 가져와 펼쳤다. 그리고 수학책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학창 시절에 읽던 책 보다 두꺼웠지만 어째서인지 설명이 더욱 자세하게 되어있다. 나는 공식의 의미와 각 기호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고, 꽤나 흥미롭게 읽으며 공부를 시작했다.
해가 높아지며, 배에서는 무언갈 채워 넣으라며 뱃고동 같은 소리를 울렸다. 헤드폰을 쓰고 있어 꼬르륵 거리는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던 노년의 여성이 나에게 미소 지으며 사탕 두 개를 건넸다. 나는 미소와 함께 작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사탕을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 뒤,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 되어 나는 도시락을 들고 도서관을 나왔다. 밥 먹을 장소는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겐 나무 그늘아래 벤치면 충분했다. 천장이 아닌, 하늘을 살짝 가린 나무 아래에서 먹는 점심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나는 재료 한 가지 한 가지를 잘 씹어 그 자체의 맛을 천천히 느꼈다. 평소라면 조금 퍽퍽하게만 느껴졌을 닭 가슴살에 고소함을 느꼈다.
벤치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도서관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느덧 사람이 많아졌다. 나는 앉아 다시 책을 폈다. 목표로 했던 그 페이지만큼 공부를 했다. 적지도 많지도 않게 딱 맞춰 공부를 하고 나는 자리를 정리했다. 아직 절반이나 남은 하루지만 꽤나 만족스러웠다.
도서관을 나와 기지개를 켰다. 날씨가 좋아 어딘가 돌아다니며 구경을 다닐까 했지만, 고관절에 약간의 통증을 느껴 집으로 가기로 했다. 도서관을 벗어나니 공원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꺄르르륵, 너도 올라와! 아 오늘 일찍 들어오라 그랬는데!”, 한 아이가 미끄럼틀에 오르며 말했다.
“아 진짜? 더 놀다 들어가면 안 돼?” 한 아이가 답했다.
“야 그럼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했다고 뻥치자”
“그래! 이따가 내가 전화하면, 너도 공부했다고 해”
“좋아!”
나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의 오늘 하루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