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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잇 Feb 23. 2024

구멍나버린 나의 캔버스 운동화

도전이 어려운 건 나만의 일이 아니다.


순진하게도 아빠 말을 믿었다. "얼마나 올라가야 돼요?"라는 나의 물음에 아빠는 "한 4시간?"이라며 가볍게 말했다. 그래, 등산이면 그 정도 하겠지,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6시간 넘게 걸린다고 했다면 아마 시작조차 안 했겠지, 싶다. 역시. 아빠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청바지에 캔버스 운동화. 엄마가 가방에 넣어 둔 초콜릿과 약간의 마실 물이 전부였던 조촐한 가방. 그렇게 중2, 초6이던 동생들과 고2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빠의 계획대로 장장 왕복 8시간이 걸린 한라산 성판악 코스 등반길에 올랐다.


입구에서 우비를 사야 한다고 했다. 날이 아직 맑은데 비가 올까? 했는데 김삼순 촬영 당시 현빈은 2개를 구입해서 올라갔다고 말씀해 주시는 가게 사장님. 2개씩이나? 그럼 적어도 1개는 사야지, 싶어서 하나씩 구매했다. 그리고 등산하며 자주 입었다. 산속 날씨는 그야말로 변덕이 죽 끓듯 했으므로.


부지런히 내려오시는 분들 틈에서 우리 가족만 하염없이 오르고 있었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닌가? 다들 새벽같이 왔다가 이미 하산하는 시간에 올라가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게다가 중간 지점인 진달래대피소에 (아마도) 3시까지는 도착해야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소식을 하산하는 아저씨에게서 들었다. 준비성 부족한 아빠를 원망할 틈도 없이 대피소를 향해 달리듯 등산했다. 이왕 시작했으니 정상은 가봐야지, 산길을 오르며 의외로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겨우 도착한 진달래 대피소. 발바닥은 아프고 먹을 건 더없이 모자라 허기진 상태. 타오르던 의지는 멈춘 발과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 하산할까? 포기할까? 망설일 틈도 없이 동생들이 출발했다. 이번에는 의지가 아니라 오기다. 나만 포기할 수는 없어 또다시 등산길에 올랐다.


얼마나 왔어요? 거의 다 왔어,를 타령처럼 반복하며 오르고 올랐지만 당최 정상에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도저히 아빠를 믿을 수 없어 하산하는 아저씨에게 얼마나 남았어요?라고 물으면 여지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얼마 안 남았어요, 거의 다 왔어요, 였다.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거의 다 왔어요'에서 '거의'는 사람마다 참 다르다는 사실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끝이 없는 산길을 올라 드디어 도착한 백록담 정상. 뿌연 안개로 당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시 기쁨을 만끽하다 서둘러 하산했다. 늦게 오르기 시작했으니 우리에게는 낭만을 누릴 시간조차도 부족했던 것이다. 이럴 거면 왜 올랐나, 생각도 잠시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올라갈 때는 미처 웃지 못했는데 내려올 때는 하염없이 웃음이 났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과연 내가 8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산에 올랐을까? 등산에 필요한 옷과 신발, 준비물을 다 갖추려 했다면 출발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아빠가 권하지 않았다면 한라산 등반에 도전하기는 했을까?


그날의 기억은 꽤나 오랫동안 우리 가족의 추억이 되었다. 모두가 준비 없이 떠난 등산길, 결국 보지 못한 백록담, 날쌘돌이 같았던 동생들의 활약과 결국 구멍나버린 나의 캔버스까지. 만약 아빠의 갑작스러운 결정이 없었다면 이 모든 추억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현대인의 두개골 안에는
석기시대의 마음이 들어있다.”

《진화한 마음》 중에서



사람은 본래 겁이 많다. 지금처럼 인간이 최강 포식자가 아니던 시절, 사람들은 어딘가에 숨어야 살 수 있었을 것이고, 호기심이 강하고 도전을 일삼던 사람들은 쉽게 죽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높은 확률로 겁쟁이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도전을 어려워한다고 해서 마음 쓰지 않아도 괜찮다. 본래 그런 것이다. 모두가 정도를 숨기고 있을 뿐 무서운 것 하나씩 또는 여러 개를 숨기며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두려움'이라는 것이 그저 서랍 속 구멍 난 팬티처럼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라산 등반을 한 번 한 것으로 도전을 운운하는 것이 요리를 배우러 다니며 계란 프라이를 할 줄 안다고 말하는 것만큼 무안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 기억은 분명 나를 도전하게 만들어주므로. 이미 그것으로 가치를 다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나의 작은 도전들이 내 아들에게도 부디 같은 경험으로 남기를 작게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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