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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약돌 Dec 23. 2020

블루베리 된 딸을 어떻게 대회에 내보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식사랑]

I can't have a blueberry as a daughter.
How is she supposed to compete?

블루베리를 내 딸로 둘 수는 없어요.
이런 애가 어떻게 경기에 나가요?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감독 팀 버튼


엄마는 또렷이 기억을 못 하지만, 어린 시절 내 마음속에 잊히지 않던 한 장면이 있다. 삼 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나는, '조약돌 엄마 피셜', 3살 때 한글을 떼고 동화책을 줄줄 읽었고, 가르쳐 주지도 않은 피아노 곡을 선율만 들으면 즉석에서 연주하는 절대음감을 선보였으며,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치는 영특함을 보였다 한다. "어머~ 이 집 딸은 어쩜 이리 똑똑해요?"라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칭찬이, 엄마의 어깨를 으쓱거리게 했다.


그러던 첫 딸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입학 후, 첫 시험이 있었고, 마침 비가 내렸던 날이었다. 엄마는 길 건너 횡단보도에서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달려가서 엄마에게 안긴 후, 깡총깡총 뛰는 장난도 하며 집까지 걸어왔다. 머리가 비에 젖어서, 엄마는 방으로 들어와 헤어 드라이기로 딸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말려 주었다. 


"그런데 시험은 어떻게 봤어? 아직 결과 모르지?"

"응~엄마, 등수는 모르는데 채점해 봤더니 전 과목 합쳐서 총 6개 틀렸어."


그러고 나서 무슨 대화를 더 나누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반에서 나보다 잘 본 애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전체 6개나 틀렸기 때문에 아마 나보다 시험을 잘 본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말을 했던 듯하다. 그 대화 이후 내 뇌리에 꽂힌 장면은, 딸의 젖은 머리를 말려 주던 헤어드라이어를 힘없이 툭 떨어뜨리고는, 방안에 있는 8살짜리 아이를 그대로 둔 채, 등을 보이고 거실로 나간 엄마의 모습이다.


일 년 후, 연년생이던 여동생이 학교에 입학했는데, 첫 시험에서 얘가 반에서 10등 정도 한 것 같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그래그래 잘했어. 그 정도면 됐지 뭘~."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엄마의 그런 반응 역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부족한 논리력으로 엄마에게 따졌다. 나에게는 전교 1등을 기대해 놓고, 동생에게는 반 10등도 만족한다니 이게 무슨 차별이냐고 했다. 엄마는 그저 멋쩍은 듯 웃으며, 네가 첫째라서 너한테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 후, 엄마는 내게 딱히 공부하라는 유언의 압박을 가하진 않았다. 그러나 난, 학창 시절 내내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지만, 나의 존재가치가 인정받을 것만 같은 심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헤어드라이어가 툭 떨어지던 소리와, 엄마의 힘 없이 쳐져 있던 어깨와 딸에 대한 실망감으로 가득했던 엄마의 뒷모습을 시+청각으로 기억한다.





묻혀 있던 이 기억을 다시금 소환한 작품이 있었으니, 팀 버튼 감독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그것이다.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들은 원작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지만, 2005년 개봉된 팀 버튼 감독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원작에 시각적, 음향적 효과를 더해 다채로움을 더해 주었다. 예전 개봉작이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가족 영화를 찾다가 넷플릭스로 이 영화를 접했다. 로알드 달의 책이야 워낙 고전적이고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영화로 본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은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다가왔다. 초콜릿 공장에 견학 간 아이들 한 명 한 명보다는 그 부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의 문제를 지닌 아이들(핵심 주인공 찰리 제외) 뒤에는, 전부 그렇게 만든 부모들이 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황금 티켓을 찾아, 윌리 웡카 씨의 초콜릿 공장에 견학 가게 된 5명의 아이들이 있다.

 

첫 번째 당첨자는 단 것을 달고 사는 과체중 소년 아우구스투스. 자기 절제력이 부족함.

두 번째 당첨자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즉석에서 얻어야 만족하는 부잣집 딸 버루카. 요구하는 것이 많으며, 버릇없고 탐욕스러움.

세 번째 당첨자는 승부에 대한 강박을 지닌 바이올렛. 자기중심적이며, 거만하고, 충동적임.

네 번째 당첨자는 TV 시청, 인터넷, 비디오 게임에 빠진 마이크 티브. 해킹으로 티켓을 얻었으며, 따라서 본인이 똑똑하다고 생각함. 어른에 대한 존중이 없으며, 폭력적 성향을 보임.

다섯 번째 당첨자는 배려심 많고, 가진 건 없어도 나눌 줄 아는 마음을 지닌 핵심 주인공 찰리.


그 아이들의 부모는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폭식증/폭식 장애(binge eating disorder)를 지닌 아우구스투스의 부모 역시 비슷한 식습관을 가진 듯 유추되는 외향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아들이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되려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아이의 식습관을 바로잡으려는 적극적 노력은 당연히 보이지 않으며, 수많은 초콜릿을 먹다가 우연찮게 황금티켓을 손에 넣어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는 일련의 과정을 오히려 즐긴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즉석에서 얻어야 만족하는 버루카의 아버지는, 딸이 갖고 싶어 하는 황금 티켓을 선물해 주기 위해 본인 회사의 노동자들을 모두 황금 티켓 찾기 노동에 투입시킨다. 한 때 우리나라를 들었다 놨다 했던 정모 양의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란 말의 원조가 팀 버튼 감독의 영화였던가. "부모도 스펙이다."의 민낯이 버루카의 아버지에게서 보인다.  

바이올렛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 대해 "누굴 닮았는지 승부욕이 넘쳐요."라고 말했으나, 실상은 본인 역시 봉 돌리기로 트로피를 땄다는 자랑을 바로 덧붙인다.

TV와 인터넷에 빠져 있는 마이크 티브의 부모 역시 방관자로 묘사되어 있다. "요즘 애들 아시잖아요. 온갖 기계와.."라고 말하면서, 본인 아들이 하는 말을 본인도 잘 이해하지는 못 한다고 토로한다.


이들 중 네 번째 참가자, 바이올렛과 그녀의 어머니를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로알드 달의 원작 소설에는 딸이 블루베리로 변한 모습을 보고 엄마가 "How is she supposed to compete?(이런 애가 어떻게 경기에 나가요?)"라고 말한 부분은 없다. 단지, 소설에서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적 묘사로 풀어낸 부분을, 영화에서는 좀 더 시각적+언어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딸의 변모된 모습에 딸 걱정보다는, 경기에의 참여 여부를 걱정하는 바이올렛 모친의 모습에 한 동안 한기를 느꼈다. 같이 영화를 보던 딸은 무섭다며 눈물을 터뜨렸다.


딸보다는 대회 참여 여부가 더 걱정인 엄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한 번 씹던 껌은 계속 끝까지 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올렛은, "Why hold onto it? (왜 그것만 씹어대?)"라며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아래와 같이 답한다.

Because I wouldn't be a champion, I'd be a loser like you.

왜냐면 그렇게 하면, 난 지거든. 너처럼 패배자 돼.



영화 속의 바이올렛은, 일그러진 승부욕으로 인해서 모든 세상을 승자(winners)와 패자(losers)로 양분화한다. 처음에는 이 아이의 반사회적 당돌함과, 승자가 아니면 패자로 양분하는 왜곡된 능력주의 사고방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같은 장면에 잡히는, 바이올렛의 눈빛과 똑 닮은,  바이올렛 모친의 강한 집착의 눈빛에서 "She's just a driven young girl. I don't know where she gets it.(얘가 누굴 닮았는지 승부욕이 넘쳐요.)"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바이올렛의 왜곡된 능력주의 사고와, 더 왜곡된 사고방식을 지닌 바이올렛의 어머니는,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2009년 TED 강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A kinder, gentler philosophy of success>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그는, 속물근성(snobbery), 그중에서도 직업에 대한 속물적 태도, 그리고 무조건적인 성과주의/능력주의(meritocracy)를 비판한다. 무조건적인 성과주의/능력주의는, 사회를 층으로 나누어서 올라갈 만한 사람들이 상층에 위치하게 된다는 생각이므로, 삶에서 누군가가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마땅히 그럴 만하다(They deserve it.)라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을 동시에 내포한다고 지적한다. 삶에서의 위치가 우연이 아니라, 각자가 자초한 마땅한 결과라는 발상은 실패의 충격을 더욱 가혹하게 만든다.

 

그럼 '속물(snob)의 반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알랭 드 보통은 '어머니'라고 말한다.


그럼 속물의 반대는?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웃음) 여러분이나 제 어머니가 그렇다기보다는 이상적인 어머니가 그렇다는 거죠.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성취한 바가 중요하지 않거든요.

출처 : <A kinder, gentler philosophy of success> by Alain de Botton, Translated by Clair Han


그렇다. 이상적인(ideal) 어머니는, 자식의 성취한 바를 기준으로 자식을 판단하지 않는다. 우연적 요소를 배제하고, 성과주의만을 강조하는 사회상으로 인해 현대에는 병들어 가는 사람이 많다. 이런 시대에 부모마저 자식을 '성과'로 판단한다면, 이 아이는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다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이야기로 돌아와서,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모두 자신의 자녀를 사랑했으며, 당신들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자녀 사랑을 표현했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아이가 먹고 있는 모습만 봐도 뿌듯했던 것이고(아우구스투스의 부모),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내 주변 인맥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다 손에 넣을 수 있게 해 주려 했던 것이고(버루카의 아버지),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본인을 닮아 승부욕 강하고, 어떤 분야에서든지 우승을 하는 딸이 자랑스러웠을 것이고(바이올렛의 어머니), 역시 사랑하는 아이가 즐기는 모습에 TV 시청 및 인터넷 게임을 허락해 주다가, 방관자의 입장에까지(마이크 티브의 아버지) 이르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엄마, 엄마는 자녀들에게 매우 희생적이며, 그 사랑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첫째 딸로 태어나 과하다 싶을 만큼 부모님사랑과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으며 자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사랑은 셋째로 아들이 태어나며, 많이 분배되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둘째 딸만 진로 선택 시 엄마의 의견을 반영해 주어, 자연스럽게 나의 지분은 3분의 1이 아니라 3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일부 나의 성취를 당신의 성취와 동일시했고, 첫째 딸인 나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나름의 고군분투의 과정을 거쳐 왔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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