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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원 Nov 16. 2022

인간정신은 자연법칙에 포섭되어 설명될 수 있는가?

스피노자 에티카 3부 전반부를 읽고나서 (1)

[정의에 앞서서]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관하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인간의 감정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증오, 분노, 질투 등과 같은 감정도 그 자체로 고려하면 다른 개별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역량에 따라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주장은 독일의 전통 – 인간의 정신과 자연을 분리하여 이해하려는 전통 – 에 대비되는, 인간의 정신 또한 자연에 포섭되어있다는 관점으로 보인다. 즉, 인간의 정신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 일원론적 관점이다.

[정의 1]

원인에는 적합한 원인과 부적합한 원인이 있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적합한 원인은 인과관계가 명확한 원인이고, 부적합한 원인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원인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적합한 원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정의 2~3]

능동과 수동의 개념을 스피노자는 ‘적합한 원인’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적합한 원인이 되었을 때 능동적인 것이 가능해진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기원인과 맥락이 같다.

[요청 1~2]

인간의 신체는 활동능력이 감소하거나 증가하거나, 그대로 유지되는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물체의 인상 혹은 흔적을 그대로 유지한다. 여기서 말하는 물체의 인상 혹은 흔적은 신체의 상처의 흔적과 같은 간단한 물리적인 흔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흔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둘 다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정리 1~2]

우리 정신은 능동적이기도 하고 수동적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이 각각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 속에서 서로 다른 양태로 나왔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 싶다. 보통 사람들은 정신에 의해 신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것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오는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의 본성 그 자체만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몽유병 환자의 예시를 뜰어서 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체가 움직이는 예시를 든다. 

그러나 뒤에서는 정신의 결단이라는 것이 단순히 욕구 그 자체일 뿐이고 신체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신과 신체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정리 4]

어떤 사물에 대한 정의는 그 사물의 본질을 긍정한다. 예컨대, 범죄에 대해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그 어떠한 정의도 범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정의 속에는 그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물의 본질을 부정하는 정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같은 맥락에서, 어떠한 사물에 대해서 그 사물자체를 의심하는 정의를 스피노자는 어떻게 바라볼까?

[정리 5]

상반되는 본성을 지닌 것들이 한 사물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같은 개체 안에 상반되는 본성을 지닌 사물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컨대 한 원자 안에는 음의 전하를 띄는 전자와 양의 전하를 띄는 양성자가 있는데, 이를 스피노자는 어떻게 바라볼까?

[정리 6]

각각의 사물들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도 매우 타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모든 생물들은 자신을 후대에 남기려는 욕구를 가진다. 번식욕구 또한 이런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리 7]

그 본성으로부터 어떠한 결과가 무조건 따라나오고(정리 36) 자연에 우연적인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정리 29)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그 사물의 필연적인 본성이라고 스피노자는 바라보는 듯 싶다.

그러나 사물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것인가? 예컨대, 자살이라는 행위는 사물의 필연적인 본성을 역행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스피노자는 가능하다고 보았을지 의문이 든다.

[정리 8]

코나투스는 시간적으로 유한하지 않고 무한정으로 지속된다고 스피노자는 말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사물은 유한한 시간속에 존재하는데 그 사물의 코나투스가 무한적으로 지속되는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정리 9]

정신은 적합한관념과 부적합한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신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정신으로는 의지, 신체로는 욕구로 대표된다. 이에 반해 욕망은 의식이 수반되는 욕구이다. 

Q. 정신은 신체 변용의 관념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해 의식하고 있다. -> (?)

[정리 10]

정리 5에서 스피노자가 주장했듯이, 정신 안에 우리 신체의 실존을 배제하는 관념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듯 하다.

[정리 11~13]

정리 11부터 13까지 스피노자는 정신이 표상하는 사물에 따라 인간의 신체의 활동능력이 증가하고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우리 정신이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가시키는 사물을 표상하려고 노력한다고 이야기한다.

쉽게 생각하자면, 우리 인간은 나의 신체적인 욕구에 부합하는 것을 가능한 내재화하려고 노력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하려고 한다. 그러한 인간의 특성을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것 같다.

[정리 14~18]

스피노자는 정리 14~18에서 정신과 사물에 대한 감정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정리 14에서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두 개의 사물에 의해 어떠한 감정을 받았으면, 그 중에 하나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하나도 떠올린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런 감정을 주지않는 사물 또한 나의 감정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정리 15에서 이야기하듯이, 나에게 감정을 주지 않는 사물 또한, 다른 감정에 영향을 주는 사물과 동시에 작용하면서 나의 기쁨 혹은 슬픔의 원인이 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쉽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여자친구랑 oo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헤어지면,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과 oo식당과 결합되어서 oo식당이 나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사물이 아님에도 나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듯 싶다. 정리 16~18에서 추가적으로 이야기하듯이 이렇게 사물들의 관계 속에서 사물들은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나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매우 타당한 이야기이다.

[정리 19~26]

스피노자는 정리 19~26에서 사랑과 증오라는 감정을 표상하는 것이 기쁨과 슬픔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자세히 설명한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증오의 상대가 파괴되고, 슬퍼질수록 나의 기쁨은 증가하고, 사랑하는 상대가 파괴되고 슬퍼할수록 나의 슬픔은 증가한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이다. 

- 스피노자는 증오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이 왜 증오의 대상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는데, 스피노자는 그러한 감정의 프로세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의견]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감정이 다른 개별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역량에 따라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과연 자연에 포섭되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인간의 행동과 욕구를 마치 선, 면, 물체의 문제처럼 고찰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과연 그러한 실증주의적인 방법으로 인간과 사회현상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예컨대, 우리는 통계적으로 평균적인 인간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한다. 대표적으로 한국 평균 남자 키는 00cm, 한국 평균 직장인 초봉은 00원, 한국 평균 수면시간 등등..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통계적으로 나열되어진 삶을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산다고 했는데, 이러한 평균의 삶은 결과적으로 어느 사람의 삶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관적 삶에 따라 사는데 이를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도 완벽한 세상의 법칙의 탐구 속에서 이러한 개별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완벽한 법칙이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설명하게 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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