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아서일까? 이른저녁 잠들어서일까?새벽에꿈을 꾸다 자주눈을 뜬다. 따뜻한 물 한잔을마시고 자리에 누웠지만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책이라도 읽을까 하다가 그냥 침대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난 과거의기억까지 헤집다보니 어느새 조용하던 길에 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암막커튼 사이로 푸르스름하게 날이 밝아오는 걸 보고야 만다. 눈 좀 붙여야 하는데 어느새아이방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처벅처벅 걸어 안방 문을 두드린다. 오늘날 샜다.
어김없이 오늘도 밤샐 각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한 동안 쓰지 못한 브런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따뜻한 차를들고 서재조명을 켜고 앉았다. 2021년 새해 첫날에도 샐러브레이션 폭죽 소리에 정신 번쩍 들어글을 써야겠다 싶어 자리에 앉았다가시작하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새웠다. 지금도 몇 시간째 첫 문장 시작도 못한 채 딴청피우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뒤척이는 중이다. 몇 줄 적다가 안 되겠다 싶어 산책을나섰다. 마침 남편이 재택근무라 아이걱정 없이 새벽 산책을 나섰다. 어둡기만 하던 며칠 전과 달리 해 뜨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는지 걷다 보면 해가 뜰 것 같다. 락다운 기간 동안 아이와 함께 걸었던 길을 새벽에 혼자 걸으니 외롭지만 또 새롭다. 걷다 보니 물안개 자욱한 템즈강 위로 해가 떠오르기시작했다. 자욱한 안개와 겨울 차가운 공기에 차분한 바람마저 고요하니 마치 윌리엄 터너의 <노엄 성의 일출> 작품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윌리엄 터너의 작품도 지금과 같은 이른 아침이었을 것같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며칠 동안 침대에서 뒤척이던 날 보다 몸이 가볍다. 피곤함보다 오늘이 고맙게 느껴졌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은 떠나지 못했지만 오늘의 산책은 혼자 여행하던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다독이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새벽 산책을요즘 즐기고 있다.
차가운 하늘 향해 손을 뻗은 겨울 나목의 아름다움
산책을 하다보면 더욱 계절 리듬을 느끼게 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무는저마다의 아름다운 풍경속에 리듬을 타고 있다. 사계 가운데 어느 계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단연코 여름이다. 영국 살며여름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에어컨 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는 영국 여름은, 무덥다. 하지만 무더위도 잠시, 저녁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 시원한 초가을 날씨다. 한낮 더위는 나무 그늘에만 앉아도 더위를 피할 수 있다.일 년 중 절반 이상이 비가 내리고,습기 먹은 날씨인 영국에서 먹구름마저사라진 화창한 날씨는 특별한 날이다. 일 년 중 풍성한 햇볕 샤워를 할 수 있는 계절이기 바로 여름이다. 영국에서의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림책 [프레드릭]처럼 햇살을 부지런히 모아야 한다.
햇살 모으는 들쥐 프레드릭 그림책 스토리는 들쥐 친구들이 부지런히 겨울 식량을 모으는 동안 들쥐 프레드릭은 게을러 보이지만 사실은 바쁘게 무언가 하고 있다.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의 따뜻함과 온통 잿빛 색깔의 겨울을 위해 따뜻한 색과 겨울나기를 위한 이야기를 모으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 비축했던 양식이 바닥나자 그제야 프레드릭은 모아둔 햇살과 색깔, 프레드릭이 모아 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며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낸다는 내용이다.
레오 니오니 작가는 그림책에서 "여행의 양이 곧 인생의 양이다"라는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햇살, 색깔, 이야기가 바로 [경험]이라는 것! 많은 풍경을 경험한 사람은 여행을 하지 않고 닫힌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가지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행=경험이 많은 사람이 프레드릭이다. 장기화되고 있는 락다운 동안 아이들과 다녀온 여행지 사진을 보며 추위를 녹여줄 여행 이야기나눠 보면 좋겠다.
레오 니오니 작품 - 프레드릭 그림책
[레오 니오니 _프레드 딕]
산책을 하며 느끼는 생각이지만 세계 정원 문화의 메카가 된 영국은 정원 사랑이 남다르다. 영국인들의 삶인 것처럼 락다운 기간에도 가든센터와 정원은 개방하고 있다. 수많은 박물관과 여행 명소들에 가려 영국 여행 코스에서 배제되었던 정원들을 다시 보는 기회가 되었다.
연간 멤버십 회원을 끊어 놓고도 자주 가지 못한 위즐리 가든(영국 왕립원예협회)을 하루가 멀다 하고 다녔다. 락다운 때문에 미술관도 못 가고, 문화활동도 하지 못해 아쉬워했던 마음은 잠시, 사람들이 찾지 않는 미술관이 아닌 거친 들판에 예술가가 창조한 조각품을 그곳에 올려두니 그것이 자연환경과 독특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그 이상의 새로운 창조공간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위즐리 가든은 야외 예술무대가 되고 그 위에서 공연하는 예술품처럼 보였다. 계절 정원마다 비발디 사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세페 아르침 볼도 - 봄 여름 가을 겨울(Four Seasons)
주세페 아르침볼도 사계의 원작은 황제 막시 밀리엄 2세의 측면 초상화로 아르침볼도를 유명하게 만든 사계절이다. 봄은 머리와 얼굴이 봄에 피는 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몸은 나뭇잎으로 홍조를 띤 뺨과 미소 짓는 얼굴이 화사해 보였다. 여름은 오이로 코를 만들었고, 체리로 눈동자를 동그랗게 튀어나온 뺨은 복숭아, 입술과 치아는 완두콩으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어 보였다. 머리도 아직 여물지 않은 밤송이와 각종 열매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을 표현하기 위해 머리에는 호박 모자를 씌웠고, 머리카락은 포도송이, 버섯이 귀, 배가 코, 사과가 뺨, 입술은 밤송이로 덥수룩한 수염도 표현했다. 몸은 포도주 통으로 보였다. 풍성하고 화려한 세 계절과는 달리 사계절의 마지막 겨울은 마른 고목나무로 인물을 표현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머리카락과 고목나무에 갈라진 틈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이 작품에서 세월의 흐름을 계절상징적 요소를 보여주며 유년기, 청소년, 청년기, 노년기라는 인생 흐름을 표현하려고 했다.
위즐리 가든에 전시된 주세페 아르침볼도 실사판을 만든 필립하스(Philliphaas) 작품
RHS Garden Wisley - SPRING
SUMMER
AUTURM
막시밀리안 2세를 표현한 WINTER, 밀짚 망토에 새겨진 이니셜 M
계절은 저 마다 매번 우리에게 살아있는 예술품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위즐리 Winter Garden에 서 있는 고목나무는 우리의 나이 듦과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목에서 뻗어져 나온 떨어져 나온 오렌지와 레몬은 어쩌면 우리에게 한줄기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두 힘든 시기를 겪고 있어서 그런지 고목나무 목으로 뻗어져 나온 한 줄기 가지에 오렌지와 레몬이 주렁주렁 열리는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이 찾아오길 바라본다.
2020년 코로나로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계절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나도 몰랐던 나의 마음 구석구석을 산책하는 계절 산책자로 만들어 준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뒤적이며 밤샌 날보다 조금씩 무엇이든 쓰고, 산책했던 날이 많아지니 새벽에 일어나는 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