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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향 Oct 11. 2023

12월의 꿈

연년생 어린 딸 둘의 손을 꼭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쇼핑을 했다. 빨간 원피스도 사고 따듯한 털신도 샀다. 아이들도 나도 초겨울 날씨에 코끝이 빨개졌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된 것 같아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다가 잠에서 깨었다. 벌떡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내 얼굴이 꿈을 꾸며 지었던 행복한 표정 그대로 웃고 있는데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들이친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얼굴이 씰룩거리다 눈물이 흘렀다. 12월, 어김없이 또 꿈을 꾸었다.      


1965년 12월, 나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랑하는 첫 딸을 잃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겨야 했던 난산 끝에 태어난 아기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숨을 거뒀고 이틀 만에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기절했다. 나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고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 작은아기는 엄마 품에 한 번도 안겨보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는 참 건강했다. 어찌나 뱃속에서 힘차게 놀았는지 아기가 움직일 때마다 내 몸도 같이 휘청거렸다. 툭 튀어나오는 작은 발도 잡아보았다가 머리가 올라올 때면 살살 쓰다듬어 주면서 기도를 했다. 옛날이야기도 들려주었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건강히 잘 자라서 반갑게 만나자고 얘기해 주었다. 가끔 ‘아빠가 늦게 들어와서 속상해’라고 고자질하면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배가 한번 크게 움직였다. 그렇게 꼬박 열 달을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진통 시간이 짧아지면서 고통이 너무 심해졌지만, 아기를 만날 생각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죽을 것 같았지만 죽을 순 없었다. 그러다 깊은 터널 속으로 빙글빙글 빨려 들어가는 공포감 같은 것이 밀려들어 오는 순간 아기가 내 몸 밖으로 나오는 걸 느꼈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작고 예쁜 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정신이 돌아오지 않던 긴 시간동안 아기는 차가운 땅속에 묻혔다고 했다. 저절로 동물의 울음소리가 내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차라리 내가 대신 죽겠다고, 다시 살려내라고 소리쳤다. 왜 내가 한번 안아보지도 않았는데 보냈느냐고 울부짖었다. 얼어붙은 땅속으로 왜 그렇게 빨리 보냈느냐고 발버둥 쳤다. 당장이라도 내 목숨과 바꾸고 싶었다. 혼자 살아남은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둔 기저귀와 배냇저고리, 작은 배게, 이불을 매일 어루만지며 편지를 썼다.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릴 수 있었다. 태명도 없이 이름을 지어주지 못해 편지의 시작은 항상 ‘내 목숨과도 바꿀 만큼 사랑하는 아가야’였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는 나에게 수도 없이 화가 났다. 미안하다고, 보고 싶다고, 엄마 젖이 자꾸 나온다고, 너를 안고 싶다고, 매일 눈물로 범벅된 편지를 썼다.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써 내려가던 편지는 다음 해 12월 이후부터는 가끔씩 그러다 더 뜨문뜨문 쓰게 되었다. 나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어준 둘째가 태어났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의 첫째가 되었다.  

   

나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56년 동안 12월만 되면 첫째를 보냈던 마음과 첫째가 된 둘째를 맞았던 마음이 뒤섞여 나는 열병을 앓는다.  빨간 원피스, 털신 그리고 양 손에 꼭 잡았던 두 아이의 작은 손. 그 꿈을 꾸고 나면 ‘우리 아기’를 만나러 갈 시간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거다.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의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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