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가 된 게 아니라 성장 과정에 있는 걸 거야.
한희가 얼마 전 나를 보더니 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나 바보가 된 것 같아요.”
세미나 수업에서 연구 주제 발표를 맡았는데, 준비한 만큼 발표는 잘 해냈다고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던 모양이다. 이어진 선배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입은 바짝 마르고, 그저 머리만 긁적이면서 연신 ‘음.~’을 되뇌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느꼈다고 했다.
스스로를 ‘바보가 된 것 같다’고 표현할 만큼, 그 순간이 크게 다가온 모양이다.
사실 선배들의 질문은 어렵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발표를 잘 마친 후,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던진 비교적 쉬운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긴장도 있었겠지만 아직 그 내용이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학습이 자신의 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곤 한다.
1단계는 인지다. 새로운 개념을 처음 접하고 알게 되는 단계다.
2단계는 이해다. 개념의 정의와 원리를 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다.
3단계는 실행이다.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준비된 상황에서 재현할 수 있는 단계다.
4단계는 적용이다. 상황이 달라져도 스스로 재구성해 활용할 수 있는 단계다.
5단계는 가르치기다. 타인에게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내 것이 된 상태다.
우리는 보통 3단계쯤에 있으면 어느 정도 학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행과 적용은 완전 다른 영역이다.
실행은 ‘재현’의 영역이고, 적용은 ‘재구성’의 영역이다.
발표는 준비된 내용을 재현하는 활동이다. 반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자리에서 내용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한희는 지금 어느 단계쯤에 있을까?
아마도 3단계와 4단계 사이일 것이다.
발표를 해낼 수 있는 실행 단계에는 도달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대해 유연하게 답하는 적용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다.
즉, 한희는 바보가 된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있다.
학습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꽤 높은 자신감을 보인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까지는 ‘할 수 있겠다’는 감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과정을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오히려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족함이 보이기 시작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불완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건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심리학 대학원 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 그렇게까지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호기심도 있었고, 학습 의지도 충분했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주변에서 들려오던 말들, “논문 쓰면 병 얻는다던데”, “공부와 연구는 완전히 달라”는 이야기들을 그때는 그저 과장된 표현처럼 받아들였다. 그런데 막상 깊이 들어가 보니, 그 말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이건 분명하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어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다음 단계로 가고 있다는 신호라는 점이다.
모른 채로 지나갈 때는 편하지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불편해진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성장이 시작된다.
메타인지가 확장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혹시 오늘,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면 그건 내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건, 내가 또 한 뼘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고.